일정시작 : | 2020-01-23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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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본기도
말씀의 초대
제1독서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18,6-9; 19,1-7
화답송
시편 56(55),2-3.9-10ㄱㄴ.10ㄷ-11.12-13(◎ 5ㄴ)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3,7-12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1요한 4,16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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