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시작 : | 2022-05-16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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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입당송
본기도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을 신처럼 대접하려는 리스트라 사람들을 소리 질러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5-18
화답송시편 115(113 하),1-2.3-4.15-16(◎ 1ㄱㄴ 참조)
복음 환호송요한 14,26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1-26
예물 기도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영성체송 요한 14,27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를 읽다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느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바오로 사도가 만난 앉은뱅이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베풀 수 없었을까?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 편에서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은총 안에서 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또 하나의 논리를 곁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인간 편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신학을 동시에 병행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긴장 관계 안에 놓아두고,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구원과 행실을 통한 구원,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쌓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사랑하는 것, 아니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믿음과 행실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주위의 형제들을 마음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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