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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강정

2014.06.12 11:27

자발적 가난 조회 수:320

하느님 창조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밀양의 할머니들이 경찰들에 의해 찢겨져 나가는 사진을 보면서

한없는 분노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수녀님들의 베일이 벗겨지고 골절을 당하고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정부

오히려 핵발전소 건설 장애물을 제거한 듯 의기양양한 경찰과 한전.

sns에서 손을 뗄 수 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습니다.

대한 지적공사와 서귀포 시청이 와서 정문 측량을 하였습니다.

공사를 하는 곳의 일부는 점용허가를 받았고

나머지 일부는 받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받을 예정인 곳에 땅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땅은 원래 강정 주민들 땅이었으니 농기구가 편하게 드나들기 위해서

강정 주민들이 조금씩 땅을 내놓고 도로가 된 농로입니다.

파괴.jpg


 

610일 연중 제 10주간 목요일

 

이제 6월이 되었습니다.

성모성월과 더불어 봄의 향연도 지나고 장미의 계절,

뜨거운 여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계절은 바뀌면서 우리 삶에 생기를 주고

변화를 유도하면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뜨거운 여름을 앞두고 찾아오는 6월이 되면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큰 자국을 남긴 6월의 역사적 사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부터 28년 전 6월 항쟁을 기억합니다.

그 뜨겁던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의 기억을 돌려보겠습니다.

19875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610일 전국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과 은폐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시위와 집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15일까지 계속되었고

6월 항쟁의 지속과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후 전두환은 결국 6, 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조치를 약속하게 됩니다. 시민들에게 굴복한 것이지요.

전두환 독재정권은 12, 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일으키고

집권한 군부 살인권력이었습니다.

그해 87,4,13일 전두환은 시민들이 그동안 주장했던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무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른바 4, 13 호헌 조치였습니다.

이 조치는 백성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겠다는 요구를 묵살하고

대통령 선거를 간접선거 방식으로 유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민주헌법 쟁취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 독재투쟁을 조직했던 것입니다.

당시 경찰은 6월 한 달 동안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하며

직격탄을 발사했으며, 사복 체포 조를 동원하여 시위자 검거에 나섰습니다.

나아가 독재 타도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좌경세력,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민주화를 주장하는 선의의 시민들을 온통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고

거침없이 탄압하며 스스로 권력의 시녀가 되고

권력의 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수치스런 경찰의 모습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을 듣기 보다는

민중의 곰팡이라는 말을 듣고 권력의 눈치만 보는 가냘픈 조직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찰 조직에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 보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경찰은 옳고 그름을 보고 행동하기 보다는 권력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따르는

정치 경찰이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요구를 잘 받들었던

경찰 간부들은 경찰 조직을 이용하여 출세 길을 달렸고

경찰 조직은 권력의 시녀로 여기저기 멍들고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경찰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양심적이고 의식 있는 성실한 경찰관들은 숨죽여 살아가며 경찰로서

한없는 부끄러움과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경찰 조직의 정치적 출세 지향주의자들로 인해

권력의 개가 되어있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경찰조직의 현재 위치를 통탄하는 성실한 경찰관들이

무척 많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경찰은 일본의 개 노릇을 했고

일본이 물러간 후 미 군정과 이승만 권력에 빌붙어

다시 짐승 노릇을 수행했습니다.

경찰은 다시 독립군 가족이나 무고한 시민을 매질하며

이승만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쿠데타 권력들 앞에서는 무수한 시민을 괴롭히며

그 대가로 고위 간부들의 출세 길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독재자의 딸 박근혜 권력의 탄생에도

경찰은 불미스런 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서울 경찰청장 김용판은

국가정보원에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는 서울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국가정보원 직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과 관련하여 부정선거와 여론조작 사건에 깊게 개입하였습니다.

현재 관악경찰서 여성 청소년과장으로 근무하는 권은희 경정은 김용판 청장이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으로 수사에 압력을 넣었다"

밝힌바 있습니다. 이처럼 경찰 고위 간부들은 경찰 조직을 자신의 정치적 출세

길의 발판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김용판 청장만 그랬겠습니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런 불행한 경찰의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경찰 제복이 부끄럽다는 양심적인 경찰들이 있는 것입니다.

28년 전 유월 항쟁 당시에도 경찰은 군부독재 권력의 요구를 받들다가

경찰조직을 만신창으로 만들었고 박종철군의 살인과 고문을 은폐하다가

경찰 수뇌부가 모두 구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경찰은 우리나라의 역사 앞에 고개를 들기가 부끄러운 짓을 반복했으며

지금도 일부 정치 경찰간부들은 경찰 조직의 명예는 뒷전에 둔 채

권력의 지시에만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부하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으며

경찰 조직에 큰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경찰조직을 공권력으로 보지 않고 개인 권력의 친위대로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강정에서도 양심의 소리를 뒤로한 채 상부의 지시와

해군과 삼성 등의 재벌 권력에 충실한 종노릇을 수행하고 있는

경찰 간부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경찰이 권력의 눈치만을 바라보며

시민들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독재 권력의 지시만 따르며

유지해오던 부패한 경찰은 정의로 무장한 시민을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 28년 전의 오늘, 바로 유월항쟁입니다.

한마디로 유월항쟁은 전두환 독재 권력이 시작된 후

시민들이 요구하는 민주화의 뜨거움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전두환 독재 권력과 그 추종세력과 정치경찰의 실체가 폭로되고

쿠데타 권력의 정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유월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가 받아들여지면서

민주화를 요구했던 여러 세력들의 입장의 차이와 현실적 한계로

유월 항쟁은 부분적인 성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유월 항쟁으로 직선제 쟁취라는 목적을 쟁취하고도

군부독재의 완전한 청산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월항쟁의 부분적 성공은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결과는 1980년대 후반 시민 사회의 여러 분야

운동이 전문화되거나 조직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고

19877~8월 노동자대투쟁과 농민집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 6,4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선거 때 행사하는 한 표는 역사적으로

6월과 이런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28년 전 뜨거운 여름을 앞둔 6월에 전국의 시민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얻어낸 절차적 민주주의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가 한 표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6, 10항쟁의 내용이며 어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유월항쟁의 의미입니다.그리고 올해는 유월항쟁(6, 10) 항쟁 2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난 61일 홍보주일이었습니다.

홍보주일에 교회는 교황담화를 발표하고 교회의 입장을 세상에 알리고

신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저는 올 해 홍보주일 담화문을 읽어내려 가는 중에

어떤 짧은 문장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교황님은 홍보주일 담화에서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 거리로 나와 상처 입은 교회와

자기 안에 갇혀 병든 교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분명 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미 복음의 기쁨에서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쇠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 합니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홍보주일 담화에서는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이라는

문장을 덧 붙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담화를 읽으면서 교황님은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거리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이란 말을 덧붙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홍보주일 담화에서까지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교회의 사회적 역할, 사회 복음화에 나서라는

간절한 당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참된 만남의 문화가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황님께서 언급하신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이라는 문장을 보고

복음의 기쁨이 떠올랐습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교회가 되기보다

거리에 나와서 상처 입은 교회를 더 좋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홍보주일 담화에서 다시 언급하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회가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때문에 거리고 나가서 다치고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런 문화가 우리 신앙인들이 창조해야할 참된 문화라고교황님은 판단하는 것입니다.

문득 28년 전 유월항쟁의 거리가 떠올랐고 명동성당이 생각났습니다.

28년 전 유월항쟁 당시 교회는 거리에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세상과 시민들과의 참된 만남이었습니다.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상처받았으며

광주학살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은 권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시민과 학생들도 남영동 경찰 고문실로 끌고 가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독재권력과 그 하수인인 경찰과 싸웠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시민들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

그 독재자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 경찰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거리의 교회는 이미 28년 전 유월항쟁 당시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 강정도 거리의 교회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나 독재자는 같습니다.

독재자의 얼굴이 바뀌었으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끌려가 고문하고 죽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죽이는 것 보다

더 영악하게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니 죽는 것이 낳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독재자들은 독재를 숨길만큼 똑똑하지 못했으나

지금의 독재는 교묘하고 교활함이 매우 심화되었고 세련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독재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6, 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누리당에 한 표를 줬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난 6, 4 지방선거의 결과는

백성이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점이 바로 더욱 교묘해지고 교활하고 치밀해진 독재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처럼 시대가 바뀌고 얼굴이 바뀌었으나 변하지 않은

독재의 본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곁을 배회하면서

우리들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 강정도 시민들이 피 땀 흘려 벌어서 세금으로 바친

돈을 개발 사업에 쏟아 붙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보사업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측면에서

권력의 본질을, 독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현장입니다.

 

이처럼 나날이 더 치밀해지는 독재의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교회와 우리들에게 똑 같이 적용됩니다.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 가만히 있지 말고 가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집에 앉아 있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가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앓은 이들은 고쳐주고 죽은 이들은 일으켜 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거꾸로 말하면 앓은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려면 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가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앓은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 때는 이것저것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평화를 위해서 움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울타리에서 안주하지 말고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길거리로 나가서 길거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일구어 나가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아직도 내 집 문 밖 거리와 교회의 문 밖 거리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어버린 사회입니다.

성공하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굴절된 세상입니다.

불법적으로 탄생한 정치권력이 나라를 통치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은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양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보로 손가락질 받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앙인이 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내 자신의 신변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무엇인가를 희생해야함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디로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그 분의 삶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결국 우리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십자가만을 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삶을 돌아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 말고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혹시 어떤 풍요와 안락함을 누리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명예를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 돌아볼 때 오늘 복음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청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

오직 평화만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이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굳건하고 지속적인 연대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는 자녀 된 마음으로 용기와 지혜를 청하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들은 흔들리지 않은 견고한 믿음으로

거짓 세력에 대응하는 지속적 저항정신이 필요합니다.

선의의 이웃들과 손잡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적 삶의 태도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삶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의 신앙이 시험당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오늘 복음의 요청을 우리 삶에서 삶으로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인지,

우리의 실천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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