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도 교구장 사목교서

by 사무처 posted Nov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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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푸는 소공동체


자비를 갈구하는 시대


 민족의 분단 70년이 지나고, 헤어진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도 못한 채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가운데, 극소수의 눈물 어린 만남도 잠시, 다시 통곡하며 헤어져야 하는 처절한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북의 대결, 좌우 이념의 갈등 구도가 이 땅을 지배하고 우리를 옭아매고 있으니 참으로 많은 이들이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몰라 허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고 있으나 정부는 경제의 큰손들인 대기업과 대자본을 살리기에 급급하여 밑바닥에 깔린 작은 인생들이 얼마나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국가의 근본은 국민이요, 법의 주인은 백성임에도, 많은 국민의 소리와 부르짖음이 무시되고 차단당한 채 허공에 산산조각으로 무산(霧散)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내리막을 달리고 있는지, 오르막을 한 발자국도 못 옮기며 비지땀만 흘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백성 모두가 애만 태우고 있는 나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하늘 높은 곳에 초연히 무심하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느님은 애만 태우는 백성들 곁에 임하시어 당신도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백성을 무척이나 가엾은 마음으로 굽어보고 다가가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참조: 마태오 9,36). 그분은 허기진 군중을 측은히 여겨 배불리시고, 슬픔에 젖은 장례행렬을 멈추시고 과부의 외아들을 죽음에서 살려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거리에서 구걸하는 태생 소경을 일으켜 세우시어 빛을 보게 하시고,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살던 팔자 센 여인과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는 세리를 형제로, 제자로 부르신, 자비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그렇고 나라 밖에서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각종 폭력에 희생되어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을 짓밟힌 채 울부짖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이 당신의 자비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부유한 이들의 무관심에 파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자비의 희년’은 우리가 상처 받은 이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상처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 주고 자비로 감싸 주며 연대와 세심한 배려로 치유해 주라’는 부르심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자신의 편안하고 충족된 삶에 안주하며 무수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라는 무기를 들기보다 ‘자비’라는 치료제를 사용하고자 합니다.”(‘자비’ 발터 카스퍼 저, 23쪽)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자비를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7장)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와 ‘진리 안의 사랑’에서 새로운 시대적 도전들에 대처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을 비롯하여 20세기와 21세기 교회를 이끌어온 네 분의 교종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도록 호소하였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증언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증언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말씀의 선포는 추상적이지 않고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인간에게 펼치시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손길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자비는 오늘의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그대로 다시 실현됨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구약과 신약의 구세사에 드러난 하느님 자비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오늘의 현실로 불러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는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통하여 고해자에게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가르치시며 죄인들과 어울리시고, 육신의 질병을 낫게 하시는 것보다 죄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것을 더 우선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얼룩과 주름과 상처를 입힙니다. 고해성사는 단순히 신자 개인의 죄에 대한 뉘우침을 하느님께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나러 가서 화해하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 죄인들을 위한 피난처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우리는 내내 짊어지고 다녔던 짐을 내려놓습니다. 영성상담이나 심리상담도 큰 도움을 주지만, 그러나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제만이 할 수 있는 ‘하느님 자비’의 구체적인 선언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자비를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신자들은 주일 미사 끝에 다양한 자선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과부, 고아, 병자, 약자, 빈민,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한 지원,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보수 지원, 광부, 수감자, 노예를 돌보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이교도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활동을 보고 ‘저들이 서로 얼마나 위하는지 좀 봐!’ 하고 크게 경탄하였다고 합니다(참조: ‘자비’ 303쪽). 오늘의 교회는 가정생활에서 실패한 이들에게, 직장생활에서 낙오와 좌절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경건한 신앙생활에게 멀어진 이들에게 얼마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 밖에도 독거노인, 장애인, 이민자, 약물 중독자, 사회적으로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게 예수님의 시선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이 교회에 와서 스스로 작아지고,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성당과 사제관이 부유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가난하고 작은이들에 대한 연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불의한 구조와 부패의 고리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명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비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피조물에 대하여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자비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존중과 생태적 회심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 가치 있고, 인간이 마음껏 소비하고 버려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지어내시고 축복하신, 고유의 가치와 품격을 갖춘 소중한 존재임을 엿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태 시민 의식’(참조; ‘찬미받으소서’ 211항)을 습득하며, 의식주 모든 영역에서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방식, 소비주의를 거부하는 소박한 삶의 스타일로 전환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히 넘쳐흐르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대림 첫째 주일에       
                                천주교 제주 교구 감목  강 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