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 2018년 성탄절 사목서한

by 사무처 posted Dec 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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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신화에서 깨어나십시오!’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19살 먹은 비정규직 청년이 혼자 일하다가 진입하던 열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여서 숨졌습니다. 그의 유품에는 컵라면이 들어있었습니다. 근무 조건이 열악하여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시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 11월에 서귀포의 한 특성화 고등학교 3학년 18살 학생이 생수업체 공장에서 혼자 일하다가 생수병 기계포장 작업 중 압착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8년 12월10일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야간 순찰을 돌던 젊은이 한 명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서 또 숨졌습니다. 그의 유품에도 컵라면이 몇 개 들어있었습니다. 이 어린 청춘들은 모두 외주 하청업체 비정규직으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다가 인생을 제대로 꽃피어보지도 못하고 지고 말았습니다. 이 발전소에서만 지난 10년 동안 12명의 비정규직이 사고사를 당했습니다. 세상이 이들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생산 공정의 한 수단으로만 보고 생산단가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다보니 이런 비극이 되풀이됩니다. 
 
  지난 12월3일에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 구역에서 쫓겨난 37세의 한 젊은이가 강제철거를 세 번씩 당한 뒤 한강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국가 권력이 강행하는 재개발사업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자진하였습니다. 12월10일에는 택시기사 한 사람이 대기업의 카풀 사업에 항의하며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을 했습니다. 가장 열악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자본의 가공할 힘에 밀리고 쫓기다가 분노하며 목숨을 던져 항의하였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들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해야 된다는 무조건적인 욕구와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사회의 가장 힘없고 나약한 이들이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구석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번영의 신화에 취하여 한없는 발전과 성장이 세상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최상의 목표로 오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번영의 신화는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절대 권력에 짓밟히고 억눌리며 종살이 하던 이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이 계시는 이집트 제국의 왕권과 번영을 위해 제일 밑바닥 백성들을 억누르고 짓밟은 태양신 신화의 아들, 파라오를 향한 도전과 항전의 메시지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는 제국 전체에 호적등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지배력과 번영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한편 제국의 변방 시골동네 처녀가 낳아 구유에 뉘인 갓난아기 예수는 제국의 황제와는 정반대의 꼭짓점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권력과 번영 대신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황제의 것은 기껏해야 쇳덩어리로 만든 동전 몇 닢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 만물은 다 하느님의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로마는 권력의 우상 얼굴이 새겨진 동전으로 지탱되는 제국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우상의 제국은 무너지고, 예수님이 세우신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나라는 갈수록 커져서 그 기둥과 그늘에 많은 이들이 기대고 쉽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의 세상도 이집트 제국, 로마 제국이 추구하던 권력과 번영을 향해 브레이크 없는 수레처럼 질주하고 있습니다. 뒤처지는 사람은 가차 없이 밟고, 버리고 가는 무자비한 수레입니다. 그런 이 시대를 향해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더 큰 권력과 더 화려한 번영을 향해 끊임없이 유혹하는 오늘의 우상들에게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종으로 내어주지 말자고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세우시고 깨우치고 계십니다. 마리아와 함께 노래하자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2018년 성탄절에     
                                                   제주교구 감목     
                                                        강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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