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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16:49

바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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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야기

뜬금없이 웬 바둑 이야긴가? 그러나 그럴 만 한 사정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대학교수(노인의 아들과 고등학교 동창)의 대국 광경이었다. 5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그 광경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 잊힐 만도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그 때의 대국 광경부터 보자.

60년대 후반, 막 바둑 붐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바둑은 아직 생소한 놀이였다. 그러고 보니 노인의 바둑 실력은 최근 붐을 타고부터 익힌 것이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격변기를 지나오면서도 바둑과 함께 한 시절이 있었음에 생각이 미치자 순간 놀라움과 존경심이 솟구쳤다.

교수가 흑을 쥔 것으로 봐서 노인의 실력은 딱히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으나 상당한 고수였으리라고 미루어 짐작이 갔다. 그의 아들이 교수와 동창생인 만큼, 교수는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몸 전체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스승 앞에 꿇어앉은 어린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야금야금 다가갔다. 도독 놈처럼 숨을 죽이고 판세를 살폈다. 바둑은 어느새 종반에 와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노인이! 살았다하고 탄성을 발하였다. 쫓기던 대마가 극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여기에 교수도묘수에 감탄하였음을 탄성으로 화답하였다. 이윽고 승부가 났고 돌을 거두었다.

이제 새 판으로 들어서게 되면 궁금증을 풀게 될 것이다. 새 판에서는 치수가 드러날 테니 노인의 바둑 수준을 알게 될 것이다. 맞바둑일까? 접바둑일까? 접바둑이라면 명 점일까? , 긴장과 호기심은 한층 더하였다. 그런데 백을 쥔 노인께서 두 점을 붙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세상에 가다가다 이 무슨 변괴란 말인가!

거기서 한 판을 더 둔 다음 교수는 나를 소개하였다. 연신 시계를 보면서 약속시간에 맞추려는 듯, 정중히 예를 다하고 황망히 자리를 떴다.

나는 뜻밖의 대국을 하게 되었다. 흑을 잡고 맞바둑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반전을 넘어가면서 부딪치는 족족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는 당최 나에게 적수가 아니었다. ‘대마불사라는 말도 있지만 싸우는 족족 하나도 살리는 게 없으니 이건 도무지 바둑 두는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백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몇 판을 더 두었다. 노인이 일어설 때까지 그 재미없는 바둑을 지루하게 두었던 것이다. 그 노인은 한 판도 건지지를 못하였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기력(碁力)을 평가하기를, “00교수와 같겠다.”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당시 나는 “00”교수와 넉 점을 붙이고 두었는데도 승률이 약했다.

사건에 대해서 할 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부딪쳐 온 편린(片鱗)들이 나에게 저 광경을 떠올리며 곰곰 생각하게 하게 만든다. 바둑의 세계에 들어섰으면 그 세계의 질서를 따라야지 하수가 두 점을 붙이면서도 백을 고집할 만큼 이 염치도 체면도 포기한 저 놀라운 광경은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음을 나는 주변에서 수없이 보고 지나고 있다.

저 질서를 무너뜨린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상대가 아들과 같은 또래이고 학교 동창인 사실이 아마 전부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왜 대국 장에까지 끼어들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그치기로 하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딱 하나를 지적하고 싶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빗나간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와 있음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교회의 세속화다. 최근에는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라고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더 이상 청정지역이 아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경우를 많이 본다. ‘성전신축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짓는 성당들은 교회의 가르침인,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것은 책임자인 교구장이 세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다툴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신축되는 성전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교구장이 교회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세속의 우상을 따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저 노인이 바둑세계의 질서를 따랐다면 대국의 내용은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교구장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성전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다. 초상을 치르기 위한 공간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납득할 수 없는 불필요한 공간이 많다. 이것들 때문에 성전은 예외 없이 구석으로, 또 위로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교회 공동체조차도 세속의 친목단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따진다면 우선 그 회의록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보면,‘인간 구원에 관한 것은 물론, 자신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공동체에)가지고 와서 연구하고 논의하고 해결하라.’고 나와 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이에 접근하고 있는지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우리 교회의 공동체, 분야별로 어지럽게 꽉 짜인 기구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기서 무엇들을 하고 있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의 교구장이나 사제들이 너무나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기구는 철저하게 갖추었지만 내용이 없다면 헛일이다. 우리의 교구장이나 사제들은 이런 점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주교들은 편하다. 주교와 사제들, 마치 졸고 있는 자들처럼 보일 때도 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 이런 직업도 별로 없을 것이다. 김창렬 주교에 이어서 강우일 주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문창우 부주교 대기 중.


                                                                                         2018.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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