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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주교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기량 본당 소속 송중보(분도)입니다. 작년 7월 사목방문 때 주교님과의 대화시간에 저는 본당 현안인 성전신축에 관하여 계획(구조) 자체가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외면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완성 부분을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명백한 잘못을 단지 주교님의 뜻이라 해서 무조건 따르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저와 망설임 끝에 이 편지를 올립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들은 교회의 선익에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밝힐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까지도 지닌다. 그럴 경우에는 교회가 그 목적으로 설립한 기구들을 통하여 언제나 솔직하고 대담하고 지혜롭게 자기 의견을 밝혀야 하며, 거룩한 임무의 수행에서 그리스도로서 행동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지녀야 한다.”<공의회문헌-교회헌장, 교계와 평신도의 관계 제37항 중에서>

라고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과거를 반성하고, 그 올바른 관계를 밝혔습니다. 이를 근거로 저는 평신도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저의 본당 현안인 성전신축 공사에 대하여 제 견해를 밝힙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최근의 성전신축공사는 교회의 가르침을 외면한 세속의 분위기가 주도하고 있는 점, 이를 차단하여야 할 주교님은 오히려 이를 조장하며 독선과 권위로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1. 성전신축,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가 따라야 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축되는 성당은 이러한 정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전신축에도 오염된 세속화의 물결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중심에 주교님이 서 있다는 점입니다.

      1) 우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축되는 성당마다 한결같이 식당이 새롭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주교님은 이것이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성전을 위로 올릴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 좁은 대지 위에 여러 용도의 공간을 배치하려면, 성당을 아래층에 두고 다른 것을 위로 올릴 경우 위층의 소음으로 조용해야 할 성당이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작년 주교님과의 대화에서). 물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의견이 어떠한 입장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합니다. 교황 방한 때, 우리는 입장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낳은 예를 보았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 가슴에 단 세월호의 리본을 뗄 것을 권유받고서 교황은, ‘고통 받는 자들 앞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치적 중립세월호를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은 속셈을 감추고 있음은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께서는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식당을 두려는 주교님의 뜻은 무엇에 바탕을 두었는지 의문입니다.

      김기량 성당의 경우 여러 용도에 해당할 것은 식당입니다. 이것이 성당에 꼭 필요한 것인지, 성전신축에 이것까지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잠시 미루고 우선 여기서 하는 일들을 먼저 보겠습니다. 기존의 다른 본당의 경우, 여기서는 주로 국수잔치초상을 치르며 조문객에게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세속의 분위기를 옮겨다 놓고 그 재미를 누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2) 김기량 성당은 건물이 부지 전체를 거의 채우고 있습니다. 건축법에서 정한 건폐율을 제외하면 달리 여유 공간이 없음은 객관적으로 명백합니다. 그런데 성당 건물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절반을 식당 겸 주차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무실과 교리실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으로 들여놨습니다. 이 때문에 성당은 좁아졌습니다. 이것은 성전을 줄일망정 식당은 확보해야겠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속의 분위기가 주도하였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3) 주차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해결할 문제이지 교회가 나설 일은 아닙니다. 명동성당도 주차장이 없습니다. 유럽의 유수한 성당들도 우리의 경우처럼 무리하여 주차장을 설치한 예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나마 현재의 주차장을 가지고 주차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그 한도에서 이해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닙니다. 주변 도로는 물론, 이도초등학교 운동장도 부족하여 멀리 주택가에까지 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 놓은 주차장은 분별없고 부끄러운 모습일 뿐입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주교님은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도무지 납득 시킬 만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는 그 태도는 교구장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관심을 어디다 두고 계신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 저희들은주교님과의 대화때 교회가 당면한 현안의 문제를 진정으로 고민하고 분석, 비판과 함께 바른 길을 제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희들에게 실망을 넘어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1) 반모임은 시행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고 거의 무관심한 상태임을 지적하고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서는 영적지도자로서 신부님의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지도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교님은, ‘안 되는 것은 다른 지역도 다 마찬가지다. 차츰 나아질 것이다라 하고는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20년을 허송하였다고 지적하였다면 최소한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짚어보는 것이 기본일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차츰 나아질 것이라며 외면해버리는 그 태도에서 사목자로서의 고민과 책임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안 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교님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태연히 지나왔다는 말인데 이는 사목자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평소 존경했던 주교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지금까지 쌓은 눈부신 활약상을 기억하는 우리 평신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인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당함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오늘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집에 가서 도저히 잠을 못 이를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면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제기한 문제를 외면하고 다른 말을 듣겠다니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이 무슨 짓궂은 장난인지, 여기에 이르면  말문이 막혀 더 이상 할 말을 잇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주교님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 말에 재미가 있었는지 웃음으로 화답하였고 주교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여유로웠습니다. 어린애들의 소꿉장난이었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현실이고 보니 참담하였습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사라진 TV 프로, ‘봉숭아 학당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어느 국정감사나 청문회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여론은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창하게 시작한 사목방문은 기대와 달리 나들이이상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2) 교황의 메시지에도 관심 없는 주교님.

      교황이 방한 일정을 마치고 간 후 TV에서 주교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사회자가 주교님에게, ‘교황께서 남기신 그 많은 말씀을 축약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여러 단체와 기관을 두루 거명하면서 행사에 협조를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뿐, 기대했던 교황의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교님 머릿속은 행사 위주의 허드렛일로 꽉 차 있어서 다른 것은 모두 이에 밀려나 끼어들 틈이 없었나 봅니다. ‘성전이 식당에 밀려났듯이.’

3. 세속에 젖은 성직자들.

우리 교회가 부패하였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직자의 부패에 집중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일입니다.

     1) 다음은 호인수신부님의 글 군림하는 주교와 편한 사제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 유럽이나 북. 남미 교회를 체험해본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만큼 목에 힘을 주고 군림하는 주교와,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제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윗물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아랫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본당마다 외국인 신부로 채워졌던 시절, 그 때의 사제들이 생각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진지한 자세가 그립습니다. 주보도 없었기에 강론 서두에 짤막하게 공지사항을 말하고 나서, 그날 복음의 중심부분을 읽고 성호를 그으면 이에 신자들이 일제히 따라 성호를 그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세속의 분위기는 완전히 차단되고 엄숙한 분위기로 들어갑니다. 시종일관 그 진지함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세속적인 안부 인사로 시작하는 강론은 우스갯소리로 웃음을 유도하는 등 세속의 분위기를 나누려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날 복음 내용과는 무관한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우리의 성직자들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보나 사목교서를 보아도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2) 다음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에서 발췌되어 소개된 이제민 신부(마산교구)의 글 중 다시 그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이 신부는,

      “몇 년 전 마산교구 사제 연수회에서 나는 교구 동료 사제들에게 성직자 중심주의와 권위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했다면서 (중략), 이어 이 신부는 마산교구의 어떤 신부는 은경축 선물로 외제차를 요구하였고 신자들은 거기에 더하여 수천만 원의 돈을 거두어 선물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직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가 공직자였다면 그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버티지 못하고 바로 자리에서 내려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여 후보를 사퇴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패한 사회도 최소한 이런 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 길들여진 평신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교회가 더 부패하였습니다.

      3) 외국 신부님들은 세속의 분위기를 차단하였습니다.

     시내 모 본당에서, 세례자들이 세례기념으로 성당에 바칠 기념품을 사기 위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본당신부님은 깜짝 놀라 호되게 질책하여 모두 되돌려주었습니다. 소액이었지만 신부님 눈에는 액수보다도 그 분위기가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비록 소액이라고 하나, 형편에 따라 또한 사정에 따라 그것은 거액이 될 수도 있고 외제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도 그 본질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신부님들은 범람하는 세속의 물결을 막아내는 방파제였습니다. 이제는 그 둑이 무너졌음을 느낍니다.

      4) PBC 평화방송에서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기념미사를 생중계하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제는 강론에서 교우들을 향하여 호되게 질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본당 신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신자들이, 이번 사제 인사이동 때 우리 신부님도 해당이 되느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본당신부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며 성토를 하였다. 본당신부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지 뒤에서 하는 비판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제는 비판의 내용에 관심이 없고 비판 자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판이 정당하다면 겸허히 받아들여 바로 시정을 해야 할 텐데 이를 덮어둔 채로 그를 위해 기도를 하라 는 그 독선과 교만의 도도한 강론을 신자들은 숨죽이고 그냥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5) 다음은 가톨릭 신문 (8.14.)에 기고한 제주교구청 고병수 신부님의 글, “, 일어나 가자”(요한 14,31)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2016년 교세 통계표를 보니 우리 제주교구의 신자 수는 75천명이고 인구 대비로 12%로 나타났다. 매년 꾸준히 신자 수가 증가하고, (중략)지역사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소중한 기도와 희생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미 교회를 떠난 상당수를 외면하였다는 점입니다. 주일 미사참례자는 전국 평균 25%~30%에 불과하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고민할 부분은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고민하는 어느 강론, 어느 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성직자들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가봅니다. 고민해야 할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 안목은 보는 것마다 형식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에는 세속의 분위기로 들어서게 됨은 필연일 것입니다. 순교자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4. 다시 현안으로 돌아 와서

    1) 대안은 무엇인가?

      신축계획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이 잘못된 계획대로 지은 것이 현재의 건물입니다. 그런데 주교님은 독선과 권위로 잘못된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 끝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식당과 주차장을 건물 안에다 둔 것입니다. 이것들을 없앤 다음 이 자리로 교리실과 사무실을 모두 옮겨야 합니다. 따로 분리한 성당 출입구의 공간도 별도로 둘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까지 모두 터놓으면 성당 공간이 훨씬 넓어집니다. 또 교리실과 사무실도 넉넉한 공간에서 충분한 면적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2층을 증축할 필요가 없음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짓지 않았던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식당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속화에 매몰된 우리에게는 기본 상식조차 실종되어 이를 느낄 만한 감각조차 마비되었습니다.

      2)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지금 증축하려는 부분은 세속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공간이지 결코 성전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성전 신축기금으로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거짓말로 하느님을 파는 행위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지경까지 와 있습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주교님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교님이 이를 조장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교구장으로서 책임이 큽니다.

6.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상자를 열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교회가 날로 세속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경은 점점 가속화하면서 날이 갈수록 고착화되어 우리를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빗나간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느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사회악 속에서 신음하는 억눌린 자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숨 막히는 경쟁사회, 기층민을 착취하는 기득권층,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들이 위안을 찾을 곳은 없습니다. 이들은 진실에 목이 말랐습니다.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들어와서 위안을 느껴야 제대로 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올 수가 없습니다. 세속화한 교회는 이미 냉소의 대상일 뿐입니다.

부패한 사회를 꾸짖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교회의 책임을 한번 쯤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회가 그렇게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부패한 교회가 어떻게 사회를 향하여 복음을 말하겠습니까?

국수잔치나 족보에도 없는 본당의 날행사 등, 이런 데에 쏟아 붓는 돈은 낭비일 뿐입니다. 그 돈으로 교회 서적을 구입한다면 몇 년 안에 교회서적은 모두 비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식당은 지으면서도 교회서적을 비치할  공간은 둘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할 일은 안 하고 버려야 할 것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치렵니다. 부질없이 유치한 편지를 올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신도의 본분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판을 올렸습니다.

독선과 권위를 스스로 거둔 사례는 역사에도 없는 듯합니다. 이를 멈추게 할 것은 오직 하나, 더 큰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중앙성당과 동광성당에 이어 김기량 성당도 판에 박은 듯 같은 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한심한 교회, 묵묵히 다녀야 합니까?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나야 합니까? 고민이 깊어집니다. 어둠을 헤쳐 나갈 등불을 쥐어주시기만을 기도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6. 9. 23.

김기량 본당 소속 송중보(분도)

  • ?
    박주환미카엘 2016.09.28 02:47 (*.33.153.45)
    송베네딕도 형제님께. 베네딕도 형제님! 사랑합니다. 행복세요. 베네딕도형제님, 이곳에 방문해 보세요. 작지만 영적으로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회신자들이기 때문이니 함께 갑시다.
    http://m.cafe.naver.com/ecclesia
  • ?
    한라산 2016.09.29 12:43 (*.114.196.215)

    박주환미카엘님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위로와 격려로 받겠습니다. 이것이 착각은 아니겠지요. 비판의 글을 몇차례 올린 후로 저는 교회에서 백안시 당하고 그 분위기에서 성당에 나가는 것은 새로운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누라조차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지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해가지고 뭇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하느냐'는 질책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어느 술자리에서 선배로부터 들은 말, '안전운행'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직'이니 '봉사'니 '사명감'이니 하는 말은 장식품에 불과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지 말고 많은 쪽에다 줄을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는 옳은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다수를 위해서 옳은 사람 하나를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웃었습니다. 어려서 그 뜻을 몰랐습니다. 이제 어렴풋이 와 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옳은 사람 하나라고 자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불만은, 제 주장, 그 내용을 비판하지 않고, 주장 자체를 막으려 모두들 한 통속으로 뭉쳐 한 사람을 밀어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 자리가 좁아집니다. '가나안 성도'들을 이해할 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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