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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어릴 때 할머니와 삼촌들을 따라 사촌형제들과 함께
주일마다 성당에 가곤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었기에 사촌들과는 달리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영성체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2학년까지 그렇게 쫓아다녔는데도 누구 한 사람 저에게
교리를 받도록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시는 교리를 받는 기간도 길고
부모 중 한 분이라도 신자라야 하는 까다로운 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주일날 성당에 가면 어떤 때에는 빵을 한 개씩 나누어주곤 했지요.
배고프던 시절, 제가 성당에 가는 또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끼리는 얼마나 다정한지 마치 한 식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적어도 성당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사촌들이 영성체 하는 것을 볼 때였습니다.

그 후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고,
점점 성당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어 결국 성당을 잊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니 이른 바 냉담자나 쉬는교우라고 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주님이 뿌린 씨앗이 묻혀 있었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볼 때마다 언젠가 종교를 가지게 된다면
천주교회에 다니겠다고 주위에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A. J. 크로닌이 지은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수없이 읽고 또 읽으며 치셤신부님처럼 삶을 이겨내자고 다짐하며,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에는 무작정 성당으로 달려가 아무도 없는 성당구석에 무릎 꿇고 앉아
하염 없이 눈물을 쏟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에서 벗어나 주기를 간구하였고,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신부님 시리즈는 우울했던 학창시절에
크게 웃을 수 있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습니다.
"십계"와 "벤허","쿼바디스" 같은 영화를 볼 때에는 친구들에게
나도 천주교신자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저에게 계속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은 자라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그대로 묻혀버렸습니다.

사회생활을 한 지 20여년이 지난 후
친구들이 별로 없는 저와 평소 형제처럼 지내는 친구가 찾아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는 의형제에게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는 바람에 가진 모든 것을
날리게 되었고, 아내마저 집을 나가버려 결국 이혼한 친구였습니다.

"내가 하는 것마다 안되니 마지막으로 성당이라도 다녀볼까 한다.
이 곳 마저 희망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같이 다니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가슴속이 찡하면서 그동안 묻혀 있었던 씨앗이 꿈틀거렸습니다.
20여년을 전쟁터 같은 사회생활 속에서 온갖 때를 묻히며 많은 상처를 입은 채 살다 보니
결국 인간은 영원히 의지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그러자고 한 후 함께 교리를 받으면서 제 아내도 설득(반 강제)하여
같이 영세를 받았습니다. 후에 그 친구의 아이들과 제 아이들까지 모두 영세를 받고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후 여러 신심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봉사직(간부)을 몇 개 하다보니 지금은 본당내의 중요한 봉사직도 맡고 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초기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마다
저는 어릴 때 성당의 모습과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록 성당 건물은 초라했지만 그 속에서 정을 나눌 수 있었고,
외국신부님은 신자들과 동고동락을 하며 직접 선교에 열을 올렸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음식을 나누어먹고, 형제처럼 지내는 신자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요, 바로 그런 모습들이 예수님이 살던 초기교회의 모습이라고 묵상해봅니다.
그런 생각이 나면 교구장님의 초기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씀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몇 년을 성당에 다니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자들끼리 나이 따지고 선후배 따지며 반말 또는 막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사회에서는 나이를 따져서 한살이라도 많으면 형(님)이라고 하고,
학교에서도 한 학년만 상급반이면 선배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도록 요구합니다.
같은 나이라도 학교를 일찍 입학하면 선배가 되어 후배들을 기합 주곤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이원복 교수는 "먼 나라 이웃나라" 한국편에서
한국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극단적인 민족"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한살이 많거나, 일년만 학교 선배면 후배들에게 늙을 때까지 어른 대접을 받으며 지내고,
후배는 나이가 아무리 들더라도 선배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는 후배가 있으면 영원히 소외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도 많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공식자리에서 과거처럼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함부로 이름을 부르며 일방적인 지시를 하지 않으며,
가정에서도 부모라고 하여 자식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곧바로 반발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요즘은 직책이 낮거나 어리다고 하여 무식하게 함부로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 또는 막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요즘 성당에서는 한 살만 나이가 많아도 형님이라고 부르길 강요하고,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에게 반말과 함께 막말을 쉽게 합니다.
동창이나 친한 친구였어도 같은 나이가 아니면 형님,동생으로 구별하여 지내도록 눈치를 줍니다.
만일 동생뻘이나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알던 사람이 성당에 나오면 바로 반말이 튀어나옵니다.
특히 예비자나 신영세자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낯이 뜨거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은 알고 보니 저희 본당뿐만이 아니라 다른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보며 인사하는 자리인데도
이야기 중에 성당에 다닌다고 하니까 대뜸 몇 살이냐고 물어보더니
자기보다 한 살 아래라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친구였지만 여기서는 형님이니까 자기는 반말 할테니 존댓말을 쓰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제가 저보다 한두 살 어린 형제에게 존댓말을 하자 그러지 말라는 충고까지 해줍니다.
그러고 보니 성당에서는 주민등록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틀린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관계로 신자들끼리 다투고 서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단순히 같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친근감의 표시로 그러는 경우나,
신앙생활을 오래해서 어른으로 인간적인 대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 도가 한참은 지나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나이를 따지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었는지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마당에
형님,동생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교회안에서 무슨 우위라도 차지하려는 것입니까?
교회안에는 형제,자매는 있어도 형님,동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ㅇㅇ형제님, ㅇㅇ자매님"으로 존대를 하여야지,
반말 또는 막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랑 같이 영세를 받은 그 친구가 저보다 생년월일이 몇 달 빨라 우리 나이로 한 살이 많다보니
자연히 그 친구와 말을 터놓고 지내는 저에게 눈총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도 저에게 했던 말을 하면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왜 우리 나이로 따져서 한 살만 위면 형님으로, 일년 선배면 깎듯이 선배대우를 하여야 하는지
사회에서 배운 지식대로, 사회의 몇 가지 관행들을 예로 들면서 설명합니다.
속세의 관행을 왜 교회내에서 적용하느냐고 한다면 건방지다고 할 태세입니다.

물론, 교회안의 전 신자가 그러는 것도 아니고, 교회 전체의 모습이 이런 것은  아니므로,
신자들을 비난하거나, 우리 교회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일부라도 공공연히 나이나 사회적인 지위 또는 신앙생활의 경륜으로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고,
단지 어리거나 신영세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하는 관행이 교회안에서 묵인된다면
초기교회의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할 뿐입니다.
신자들끼리 이런 것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아픕니다.
계속 속앓이를 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주기를 바라며 기도하면 될까요?
왜 하필이면 속세에서도 쓰다 버린 쓰레기 같은 관행을 교회에서는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서 속세의 나쁜 관습을 끊어버리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로써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최소한의 인격이 있습니다.
모두 같은 자녀로 받아들이신 주님이 보시기에 과연 좋은 모습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005년도 교구장님의 사목방침이 내려온 것으로 압니다.
표어가 "가정 안에 육화되는 소공동체" 입니다.

가정 안에 육화되는 소공동체가 되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부터 서로 존댓말을 쓰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내에서는 모든 신자들끼리 존댓말을 쓰도록 합니다.
아예 이 참에 교구차원에서 "존댓말 쓰기 운동"이라도 벌일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아울러 각 본당에서는 신자들끼리 "인사 잘하고 잘 받기 운동"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 부분은 봉사자인 본당의 사목임원들과 각 신심단체 간부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사를 할 줄 모르는 젊은 형제,자매님들을 볼 때면 그 부모님들 생각이 나서 안타깝습니다.
또, 신영세자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도 인사를 받기는 커녕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일부신자들을 볼 때는
그 신영세자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우리 교회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존댓말 쓰기 운동"과 "인사 잘하고 잘 받기 운동"이 교회안에 확산됨으로써
많은 신자들이 계속 같은 죄로 인하여 고백성사를 보는 원인을 없애주시고,
첫 영세를 받을 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모두가 돌아갈 수 있도록 신선한 충격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사마리아여인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지금 우리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변화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적인 나이, 지위, 신분, 체면, 재물 따위와 신앙적인 경륜 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각자의 신앙생활에 있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도 모두 버린 채
순수하게 교회의 발전과 주님이 바라는 길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혹시, 제 이야기 때문에 상처받는 분이 없기를 바라며
만일 있게 된다면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써 경배하여야 마땅함을 우리는 압니다.
머리만이 아닌 가슴으로, 또 온전한 믿음으로 새롭게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참 평화를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