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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부활절에 내놓은 강우일 주교님의 막연한 사목서한

다시 주교님 사목서한을 보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추상적이고 형식적이다.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없다.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가한 타령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메시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부끄러운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이를 감수하고 나의 생각을 여기다 털어 놓기로 했다. <표 안에는 교서를 인용하였다.>

이리 나와라!’

금년의 봄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희망찬 봄입니다. 3년 동안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 파묻혀 있던 세월호가 떠올랐고, 304명의 귀중한 생명을 수장해버린 우리 사회의 그릇된 구조와 관행과 악을 옹호하고 지키던 제왕적 권력이 허물어진 봄입니다. 생명의 봄 4에 우리 모두는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오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피로 멍든 많은 가슴들은 차갑게 얼어붙어 땅 속에 갇혀있던 쌓이고 쌓인 한들이 따뜻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하늘 높이 승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둠과 빛, 죽음과 생명, 희망 등은 익숙한 말들이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세월호제왕적 권력이라면 구체성이 느껴지는데, 다시 새로운 시대의 막’, ‘피로 멍든 가슴’, ‘차갑게 얼어붙어 땅 속에 쌓이고 쌓인 한’, ‘따뜻한 봄날의 아지랑이’, ‘하늘높이 승천등으로 이어지면서 어려워진다. 어디다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안개 속을 더듬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요약한다면 금년의 봄은 희망찬 봄이라는 사실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갇혀있던 한이 승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새겨본다.

1) ‘새로운 시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막연하게 느껴진다. 갇혀있던 한이 승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려운 말들과 함께 섞어 놓고 보니 생명의 봄’, ‘희망찬 봄도 같이 어려워진다. 이 서한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서한의 내용을 쫓아가 보자.

이 봄에 세월호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으로 갑자기 비통하게 사로잡혀간 많은 사람들이 기억납니다. 무더기로 해고된 KTX 계약직 여승무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소송에 승소를 해서 보상금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5년 대법원이 계약직 해고는 위법이 아니라고 최종 판결하였고, 이 판결로 인해 받았던 보상금도 도로 반환해야 했던 한 여승무원은 결국 자기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전철역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3년부터 해마다 열차에 치이는 사고로 네 명이나 죽어갔습니다. 철도에서, 제철소에서, 우리 산업 모든 분야에서 위험한 노동환경과 과도한 업무로 수많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201412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때 문건 유출 혐의를 받던 최경락 경위가 엄청난 외부의 압박을 받고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그 시절 민정비서실의 책임자였던 김영한 민정수석이 청와대 내부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사직하였고, 반년 동안 술로 고통을 달래다가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20154월 경제사범으로 조사 받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자신이 돈을 건넨 지난 정권의 유력 인사들의 리스트를 호주머니에 넣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그 리스트의 진실은 결국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20151114일 민중총궐기 시위 때 전남 보성에서 상경하여 시위를 하다가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칠순 노인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10개월이 지난 2016925일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듯 원인도 밝혀지지 않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사죄도 없고 보상도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들이 줄지어 이어졌습니다. 이런 죽음의 주인공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을까요? 누가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잊혀져버리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세상의 부조리가 그렇게 끝나도 되는 것일까요

 

2) 사목 교서에는 언제나 이런 비판이 단골 메뉴로 나온다. 요즘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비판할 대상이 넘쳐난다. 억울한 죽음, 에매한 죽음,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죽음들이 어디 이 뿐일까?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을 모두 여기다 올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생각나는 것 몇 가지를 표본으로 올려놓고, “이렇게 끝나도 되는 것일까요?” 하고 탄식이 섞인 비판을 내놓고 있다. 이로써 서한은 할 말을 다 한 모양이다.

3) 반복되는 서한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교회가 이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최근에 보도된 대구 희망원 사건을 보자. 이 곳은 천주교가 운영하는 곳으로, 최근 28개월 사이에 인권유린으로 인하여 무려 129명이 사망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회에 놀라움과 충격을 주고 있다. 대구지방검찰청 특별수사팀의, 희망원을 둘러싼 각종 인권침해와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 발표된 주요 범죄사실은 국가보조금 허위청구·급식비 횡령 등 자금 관련 비리 업무상과실 폭행 등에 의한 사망 생활재활교사들에 의한 생활인 폭행·금품편취 내부규칙위반 생활인 징계를 위한 독방 감금시설 운영 등으로 밝혀졌다.

이 참담한 현실을 앞에 두고 대구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단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뭉개어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천주교회의 민낯이다. 이들 희생자는 앞서의 위로받는 자들의 대열에 오르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다.

4) 책임을 통감하였다면 주교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에서라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교회는 책임도 없고 반성도 없다. 교회는 사회보다도 더 썩었다. 이런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비판하고 있다. 반성은커녕, 비판을 하다니 뻔뻔하고 염치가 없다. 이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5) 한심한 서한을 다시 보자.

이제 비로소 봄다운 봄이 왔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이렇게 따뜻한 봄이 오리라고 예상도 못 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봄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을 당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며 무덤에 묻힌 모든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과 비분에 위로와 환희의 목소리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북받치신 예수님이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듯이 이들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리 나와라!’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축복이 모든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봄다운 봄이라 한다. 봄이면 봄이지 도대체 어떤 봄이기에 봄다운 봄이란 말이 나오는가? “우리들 중 누구도 이렇게 따뜻한 봄이 오리라고 예상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봄은 따뜻한 것이다. 우리는 겨우내 움츠리는 동안 따뜻한 봄을 기대한다. 이것은 대자연의 섭리 즉, 창조주의 섭리가 아닌가? 가난에 찌든 어느 서생도 믿을 건 오직 계절의 순환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덜덜 떨면서, ‘요놈, 요 추위란 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어디 내년 오뉴월에 두고 보자! 하면서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았다.”(이희승의 남산골딸깍발이 중에서)고 한다. 어려운 우리네 살림은 자연의 품속에서 겨울을 이겨내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렇게 따뜻한 봄이라니, 달리 우리는 추운 봄에서만 살아왔다는 말인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자연의 법칙을 예상치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은 자리를 잘못 차지한 것 같다. 모자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해결되기는커녕, 머리만 뱅뱅 돌 뿐이다. 그냥 의문으로만 여기고 넘어갈 수밖에.

이리 나와라!”는 마무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별 의미 없이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다.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서, ‘어디로 말입니까하고 반문 할 것 같다. 횡설수설하다 보니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이 정도 넋두리로서는 속이 안 풀린다. 누구 만나서 소주라도 한잔 하면 막힌 속이 터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