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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 소년시절의 천주교 신앙 천진암 -------------------------------------------------------------------------------- 정약용 선생은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으며, 교리 일부는 한동안 실천하기도 하였다. ! 바다 물에서 자라난 짠물 고기에 소금기가 묻지 않을 수 없듯이, 어려서 소년시절부터 남인계 實學者들 중에서도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선후배 인물들 사이에서 인간관계를 맺으며 성장한 實學者 丁若鏞 선생은, 이하에서 밝혀지고 명증되듯이,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과 정신으로 믿고 있었으며, 일부 교리는 실천까지 하였었다. 이 때나 그 때나 소년시절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사상과 지식에 마음과 정신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는 시기다. 일부 인사들은 정약용 선생의 아래 글만을 읽고, 다산은 1784년 22세 때에 처음으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다른 많은 기록들도 무시하지 말아야 할뿐더러, 아래 그 글의 文章과 文脈도 좀 자세히 읽어보면, 茶山公이 1784년에 와서야 생전 처음 천주교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만 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漢文과 國語에 대한 理解다. 즉, “갑진년(1784년)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 西敎에 관해 듣고 한권의 책을 보았다” (甲辰夏從李檗舟下斗尾峽始聞西敎見一卷書. 번역문은 박석무 역 참조. 自撰墓誌銘 集中本 원문은 與猶堂全書 제2권 633면, 驪江出版社 1985.) 위 문장은 茶山公이 1822년 61세 回甲 때 38년 전의 옛 추억을 더듬어 회상하며 기록한 것인데, 여기서, “始聞西敎見一卷書”를 마치, “西敎에 대하여 생전 처음 들었으며 책도 한권 처음으로 읽어보았다”는 의미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시문서교(始聞西敎)]를, “今時初聞西敎”, 즉, “생전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는 의미로만 알아듣고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어문제이긴 하지만, 예컨대, 친구네 제사 집에 가서 앉아 기다리던 시장한 선비가 제사음식 먹은 이야기를 훗날 쓰면서, “始食祭粲”이라고 썼다하여, 제사음식을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始”라는 漢字의 뜻은, “비로서”, “바야흐로”, \"드디어\" 등의 의미로 쓰이는 副詞語이다. 한마디로 “始聞”을 “初聞”으로만 알아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즉, [始聞]이 [今時初聞]이란 의미는 아니다.\" “비로서 들었다. 듣기 시작하였다\"는 뜻으로, ”생전에 최초로, 처음으로 들었다“는 말과는 語感과 語義가 다르다. 같은 내용을 이보다 앞서 茶山은 좀 자세히 기록해 놓은 적이 있다. 즉, 1816년 55세 때 流配 중에 자기 형 정약전의 사망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32년 전의 옛일을 더듬어가며, 先仲氏墓誌銘을 기록하였는데, 그 末尾의 附見 閒話 條에는 위의 같은 내용을 좀 상세하고도 달리 써놓았다. 즉, “갑진년(1784년) 4월 보름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속에서 천지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 등을 듣고 황홀함과 놀람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해 마치 [莊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라는 것과 비슷했다. 서울에 온 후 이벽을 따라다니다. 實義와 七極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흔쾌하게 그쪽으로 기울어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제사지내는 일을 폐해버린다는 설이 없었다.” (甲辰四月之望旣祭丘嫂之忌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舟中聞天地造化之始形神生死之理창황驚疑若河漢之無極入京又從德操見實義七極等數卷始欣然傾嚮而此時無廢祭之說.-번역문은 박석무 역 참조. 先仲氏墓誌銘 원문은 與猶堂全書 제2권 627면, 驪江出版社 1985.) 같은 내용을 기록한 양쪽 어디에서도,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생전 처음(初聞) 들었다”는 의미는 없다. 여기서 사용된 “始”의 뜻은, “비로서”, “바야흐로”라는 의미인데, 지금이나 옛 말에서, “비로서”가 “생전 처음”의 의미는 아닌 副詞語이다. 한마디로, “始聞”이라는 말과, “初聞”이라는 말은 비슷하지만 좀 다른 뜻이다. 국어상의 용도도 다르다. 한마디로, \"始聞\"이란 \"듣기\"를 시작한다는 뜻이지, “생전에 처음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이 달레(Dallet)신부의 교회사 책과 그 원본이 되는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도 모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연도만 갑진년이라하지 않고 계묘년(1783년) 음력 4월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초대 천주교인들이 쓴 이야기를 보면, 이벽은 그의 누이의 1週忌를 기회로 마재에 있는 丁氏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 초 여름 음력 4월 15일에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동안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역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 연구였다.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후세의 상선 벌악 등 문제를 차례차례로 검토하고 해석하였다.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 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고 황홀해졌다.” \"Au commencement de l\'ete 1783, 15 de la 4ieme Lune(Kie Mio),apres avoir ete a Ma-Tsai dans la famille Tieng, pour l\'anniversaire de la mort de sa soeur, il monta sur un bateau avec les deux freres Tieng-Jak-Tsien et Jak-Iong pour se redre a la capitale,,,,,,,tous les passagers,,,,,,\" 즉, 두미에서 서울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배 위에서의 이벽의 철학적 강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하였던지 배안의 승객들이 모두 이렇게 아름답고 위로와 기쁨을 주는 강연은 처음듣는다고 감탄하였다”고 하였다.(Daveluy 주교의 조선천주교 순교자들의 비망기, p.8) 다불뤼 주교의 기록은 당시 이벽 성조의 船上 강론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배 안에 모든 승객들이 이런 강연은 처음 들어본다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어디에도 정약용이 전혀 모르고 있던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어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없다. 특히 始聞의 ‘始’라는 漢字 의미와 용도를 사전에서 보면, 漢文 사전에서 \"始\"는, \"首止切\" \"式吏切\", \"新起\"로서, 어떤 행위를 시작한다는 뜻이지, 처음으로 한다는 뜻은 아니고, 따라서 전에는 전혀 없던 처음이란 뜻과는 다른 뜻이다. 몇가지 예를 들면, 시구식(始球式)하다 혹은 始球하다는 말이 생전 처음 공을 던진다는 뜻이 아니고, 공 던지기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혹은 시작 공을 던진다는 의미일 뿐이다.시무식(始務式)하다는 말도 생전 처음 업무를 개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업무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始動 걸다는 말도 생전 처음 움직이게 한다는 原動(motus primus)의 뜻이 아니라, 動을 시작한다(initio motus)는 뜻이지, 最初(in chronoligia)라는 의미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始業式하다는 말도 생전 처음 업무를 시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이라는 말과, \"시작\"이라는 말이 같은 용도로 쓰일 때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이한 것이다. 특히 漢文 文章에서 漢字는 글자 한두자만을 추려서 풀이해서는 안되고, 그 文章 전체 속에서 理解해야 하며, 文章은 전체 文脈 안에서, 즉 그 페이지 전체 속에서 알아들어야 하며, 그 페이지는 그 책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여야 하고, 그 책 내용 전체는 그 책 著述家의 지식과 경력과 시대와 장소와 집필 당시의 입장과 처지와 쓰여진 시대상황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識者들의 常識에 속하는 이야기다. 특히 위의 내용은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天主敎 信仰 履歷書를 알릴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선후 문맥을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천주교 박해로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유배생활까지하던 때로 아직도 박해가 끝나지 않던 시기이다. 즉, 1815년 乙亥年 박해와 1827년 丁亥年 박해 사이의 살벌한 상황에서 1816년과 1822년에 쓰여졌다는 것도 감안하며 읽어야 할 문장들이다. 또 이승훈 성현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후 1784년 갑진년에 수표동 이벽성조의 자택에서 정약용 선생도 즉시 세례를 받았는데(於甲辰年間 與若鏞會於李檗家 而若鏞蠱惑禦此術 請受領洗於矣身 故矣身爲之矣,推案及鞫案, 순조1년 2월13일조), 이때 영세자들은 명례방 영세자들과 달리, 이미 음력주일 엄수 등, 벌써부터 천주교 신앙인으로 살며 꽤 오래동안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본당, 교구, 등 제도적인 교회가 아직 없을 때이고, 또 기도책이 없어서, 이승훈 선생이 가져온 기도서를 돌려가며 베껴서 한권씩 나누어주어 기도하던 때다. 사실 종교는 책으로 시작되지 않고 강론으로, 강학으로 복음선포로 시작된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신약성경은 예수님 부활 승천 후 30여년 후에야 출현하며, 동학의 東經大全 龍潭遺詞도 최제우 순교 후 30여년 후에야 목판본이 나왔다. 또한 당시 조선 선비들의 학계에 천주교 교리연구가 성장하는 전후 사정도 간결히 살펴보자. 1590년대 말부터 세계 문화 지식을 소개하던 이수광(1563~1628)의 芝峯類說이나 天主實義, 등이 이미 木版本으로까지(1614년 20권 10책으로 편찬) 학계에 널리 보급되어, 당시 조선의 대부분 학자들과 선비들에게는 천주교가 찬반토론의 대상이 되어 내려왔었고, 이수광 이후에도 계속하여, 허균(1569~1618)을 비롯한 정두원(1581~1641), 이이명(1658~1722), 등 實學運動의 선구자들을 통해서 조선 선비들은 天學 知識을 얻어 연구하며, 天主敎 敎理 일부는 실천까지 하고 있었다. 특히 앞으로 이이명의 天學思想에 관해서는 후학들이 깊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의 대홍수 속에서 천재적인 선비 정약용만이 22세가 되도록 천주교에 대하여 전혀 들어보지도 못하고, 1784년에 와서야 생전 처음 들어 알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이익(1681~1763)과 그 문하생들인 윤동규(1695~1773), 신후담(1702~1761?), 안정복(1712~1791), 등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쓸 정도로 선비들과 이를 연구하고 있었고, 일반 선비들이 여기에 물들지 않게 예방시키려 하였으며, 특히 정약용 선생은 이익 선생의 유고집까지 접하였고, 형제 중 가장 친한 정약전은 성호 이익선생의 사상과 저서에 매혹되어 있었다. 또 홍유한(1726~1785) 같은 학자는 자신이 터득한 천주교의 교리 일부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서양의 문물 소개와 함께 천주교는 200여년간 조선의 학계와 書堂街에서 자연스레 소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요새 속된 표현으로 ‘책벌레’였던 천재적인 선비 정약용 선생만이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은, 정약용 선생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말이든가, 아니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후대인들이 잘못 풀이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를 알아보고 실천해보는 것은 모든 나라에서 항상 進步的인 젊은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保守的인 어른들은 늘 뒤늦게 젊은 이들에게 끌려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만 하여도 최초의 불교 신자였던 염촉 이차돈(505?~527)이 22세에 순교하는데, 佛道를 닦기 시작한 것은 17세 전후로 보며, 東學 創始者 최제우 大神師(1824~1864)도 10대 후반 20세 미만에 이미 天道에 뜻을 두게 된다. 한국천주교회도 예외없이 10대후반, 20대 초반의 젊은 이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니, 기해년(1779년) 講學 당시를 중심으로 보면, 이총억 15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권상학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3세, 이벽 25세였다. 아직 實學者라는 명성을 얻기 전의 청소년들이었다. 소년시절부터 자기 형 정약전과 함께 학문을 좋아하던 정약용 선생은 8세 위의 이벽 성조를 따르며(從) 너무나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이미 자신이 결혼하던 1777년 15세 때, 유일하게 이벽성조께만 獻詩를 지어드리며, 이벽 성조의 학식과 덕행에 탄복하고 있다(與猶堂全書 제1권 1면, 贈李檗). 이에 대한 정약용 선생의 天眞消搖集과 천주교 문헌들의 기록은 너무나 많아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다고 보며, 적어도 단산 공이 천주교신앙인지에 대한 원칙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누가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 언제부터 성당에 다녔는지, 정말 천주교를 믿던 신자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밝혀줄 수 있는 最後의 最終的인 有權 確認者내지 有權 解釋者는 바로 자기네 신자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가장 잘 알 수 밖에 없는 소속 단체인 천주교회의 고유 업무이기 때문이다. 종종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각가지 이유로 비밀에 붙일 수도 있고, 속일 수도 있으나, 천주교회를 속이거나, 천주교회 모르게 천주교회를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약용 선생이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 언제쯤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에 대하여 가족들이나 친구들보다는 천주교회 단체 책임자들의 말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천주교회의 문헌 기록들을 몇가지만 더 살펴보면, 제5대 조선교구장으로 순교한 Daveluy 주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벽이 천주교를 강론하기 훨씬 200여년 전에 이미 천주교는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고 정약용은 말하고 있다. (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etait connue en Coree pres de 200 ans avant les Conferences de Ni Pieki.)”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록] p.3 - “조선 천주교회의 기원에 관계된 대부분의 내용들은 앞으로도 종종 거론되는 정약용이 기록하고 수집한 문서에 의한 것인데, 정약용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최초부터(ab initio) 모든 일에 참여하였고, 또 조선 천주교회 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과도 交分을 나누는 친구였다 (Les documents dans les quels nous avons puisé la plupart des faits relatif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ée, ont été réunis par Tieng Iak-Iong dont il est souvent parlé. Il fut nommé Jean au baptème et eut part presque à toutes les affaires de la Religion ab initio. Il étai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principaux chefs.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록] p.5 ). 위에서 말하는, “最初부터(ab initio)\"라는 말의 뜻은, 다불뤼 주교가 조선 천주교회의 진정한(proprement)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講學에서”라고 밝힌 천진암에서의 天學講學과 그 實遷을 두고 말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Eduarus Eucarpiae 주교가, “철저히 먼저 검증하여(praevium examen) 편찬하였다”는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에서는 정약용의 이름이 최초의 강학회 참석자들 속에 들어 있다. 즉, “그 당시 조선의 어떤 학자들은 고요한 은둔처에 머물면서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니, 저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은 별명을 ‘고집이 세다’는 의미로 檗이라고 하는 李德祖와 權哲身과 정씨네 두 형제 즉 丁若銓과 丁若鏞이었다. 이들은 인간 본성과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검토한 후, 그리스도교 서적들 내용을 뒤져 훑어보았다. 그 다음 하늘의 섭리와 사람의 영혼과 덕행과 악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아름답다고 판단하였고, 즉시 자신들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에 일치시키기로 확정하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다(1770년).”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unt in solitudinem,ut studiis pholosophicis vacarent: inter eos eninebant Ni-Tck-Tso, cognominatus Piek-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Iak-Tsien,et Tieng-Jak-I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a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cr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vi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p. supplementum 136. PULO-PINANG 1885-)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 정약용 선생의 탄생일인 8월 5일을 기념일로 정하여 정약용 선생을 한국천주교회가 잊지 않게 하려는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으며, 다음에 더 자세히 재론될 것이다. 여타의 문헌은 필자의 졸저, “간추린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를 참조하면 여러 가지 자료 일부를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으로, 정약용 선생이 쓴 정약전 묘지명과 자찬묘지명과 다불뤼 주교의 조선천주교 순교 자들의 비망기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또 다른 많은 여러 문헌들과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 정약용 선생은 1784년 22세 되던 해에 배 위에서 생전 처음 천주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아니고, 그 때 처음으로 천주교 책을 한권 보았다는 의미로 그 간결한 문장을 해석해서도 안될 것이다. 더욱이 이벽 전에서 丁學術이 천진암에서의 젊은이들 모임을 , 叢林이라고 하였고, 정약용 선생은 天眞消搖集에서 少林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 이벽성조의 聖敎要旨를 下筆받아 배우던 젊은이들과 함께하던 시절과 講磨하던 소년시절 추억을 못내 그리워하며, 마침내 정약용 선생은 1827년 65세 때, 4개월을 앓고 일어나서 옛 친구들 2명과 3가정의 아들들 3명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3일이나 머물면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몇 줄만 뽑아서 되새겨보자(여유당전집 제1집 詩文集 제7권 참조.). <天眞菴에 와서 보니, > 바윗돌 사이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石徑細如線(석경세여선)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昔我童時游(석아동시유) 일찍이 “붉은 잎”을 題目으로 받아 詩를 짓던 이곳을, 紅葉題詩處(홍엽제시처)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애닲으도다.重來愴客心(중래창객심) 호걸과 명사들이 일찍이 강학하며 독서하던 이곳에서, 豪士昔講讀(호사석강독) 상서는 한 권씩 외운 후 불태워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尙書此燒鍊(상서차서련) 황폐한 요사체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게 덮여 자라고 있고,荒寮草色深(황료초색심) 참선하던 선방엔 불이 꺼져 아주 폐쇄되었네그려. 禪燈廢少林(선등폐소림)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德目 외우기는 차마 부끄러워도, 寅緣慙講德(인연참강덕) 산그늘지면 그래도 책(祈禱書?)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 書帙見隨陰(서질견수음) 옛날처럼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도다. 前躅凄迷不可求(전촉처미불가구) 경작(耕作)하려 개와장도 모아 수북히 쌓았는데,破瓦耕翻壘壘丘(파와경반첩첩구) 어디 가도 선방 친구들을 다시 찾아올 곳 없네.禪房無處舊人求(선방무처구인구) 누각 앞 기숙사들은 다 무너져 절반이 빈터인데,樓前寮舍半墟丘(루전료사반허구) 삼십년 만에 내가 나그네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三十年來重到客(삽십년래중도객) 나는 괴로운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 신세로세. 猶然苦海一孤舟(유연고해일고주) 천진암에서 하산(下山)하면서는, 고향에 왔다가는 사람처럼 애절한 감정을 밝히고 있다. “여기 또 와서 아주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지만, (我欲來此住아욕래차주) 오고 머물 편의를 제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네((無人示方便무인시방편)!” -天眞消搖集- -2008/2/12/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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