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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강정

2014.04.15 07:26

자발적 가난 조회 수:235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414일 성주간 월요일

 

주례 강론 김회인

 

네 여기계신 모든 분들 서로 인사 나눌께요!

사랑합니다! 예 사랑합니다!

들리시죠? 네 사랑합니다.

미사 전 인사말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여러

원리가운데 효율성고 합리성이 전제 되어야 소위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많아들 갖곤 하고 있죠?

그리고 이를 불변의 진리로 믿으며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특정인만의 생각이 아니죠!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이게 정답인양 배우는 거

최소자본으로 최고 이윤을 획득하는 것.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이 사회의 근저에서 우리는 이를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고

이러한 논리가 반영이 되어서 이미 패권국가들 내부에서 조차

신 자유주의라는 것이 이제 허구이다! 라는 사실에 도래 했고

그 대안을 간구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 나라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옹호 되는 듯

보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 사회는 사람의 생명을 기르는 수단이자 인간이기에

본질을 갖게 되는 권리인 노동마저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

전부터 이미 계속되고 말았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경제 발전 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혹하죠.

경제라는 단어는 이 사회에 속한 모든 시민들의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 단어를 위협하는 어떠한 단체들도

무리 혹은 세력이라는 표현으로 극단주의 소수의 사회분열자로 인식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지속가능한 성장

사회발전이라고 규정하는 그네들이 말하는 것들을 위협하는 논리를 펼치는

모든 일들 이들에게 대해서는 법과 원칙이라는 것을 빌미로

이들을 통제하고 심지어 배제 곧 소외되어 사회에서 멀리

내쫓는 일들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경제논리가 적용되지도 않고 적용되어서도 안 되는 이곳 강정을 두고

사람들이 바라는 시선 또한 이러한 연정선상에서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만일 앞서 말한 그러한 부류들이 말하는 제도에서

규정한 사회 안으로 다시금 소속 곧 사회적 규제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위한 전제조건으로 그 옛날 양심수에게 했던 방식대로

사상을 전향 하는 것 곧 그네들이 말하는 경제를 위한 발전을 위한

효율성과 합리의 원리를 수긍하는 것만을 제시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공적영역 안에서 곧 공공부문의 특수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조차 인념이라는 이름으로 효율성을 빌미로 공공성을

유지고자 외치는 많은 이들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로서

포장되어 있죠. 만일 이러한 효율과 합리를 생각하는 가운데에

오늘 복음에서의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을 듣노라면

곧 어찌하여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 이에 대한 성경의 평가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라는 평가는 앞서 말한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는 지나친 판단이라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세뇌되어서 당연하다고 말하는

원리 최소 자본으로 최대이윤을 획득하는 것 이것이 시장을 지배한다고

알고 있고 이를 두고 효율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원리대로만 한다면 가난한 이들 구원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가진 역량이 한계가 있기에 이 역량을 최소한으로 쓰는만큼

이를 나누어 쓸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유다 이스카이옷의 말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효율적인 말입니까? 이러한 것으로만 본다면

분명 유다의 말은 일정부문 이 시대의 시선으로 보건데

정당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전하는 것처럼 돈주머니를 차고 있는 이

곧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돈 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가난한 이들을 구원해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치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적인 가난에서

구원하는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주님을

우리가 주님이라 고백하는 예수님을 따랐을지 모르죠.

그리하여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한

미래의 비전을 발견 할 수 없었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찾아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유다가 관과 한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와 나자로가 예수님께 부었던 향유의 가치는 실상

세상이 말하는 절대적인 세상의 가치로 규정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죽음의 자리까지도 찾아와서

바로 자신을 죽음을 어둠으로 부토 해방시켜준 그 예수님의 만남을

체험 하였던 그 때 이루어 졌던 가치 바로 이 가치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인해 얻게 되었던

체험적인 각자의 상대적인 가치이었습니다.

신문을 보니 20074월부터 201312월까지 제주해군반대활동으로

연행된 사람들 649명 이 가운데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

589명 구속자 38명 현재 기소건수 200여건 이 간운데 벌금형 재판중인

사안을 제외하고 벌금이 총 26천여억원 많은 분들은 앞선

사회시스템 속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많은 분들은

유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많은 분들은

지금 이러한 강정에서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닌가? 그리고 구럼비 구럼비 하는데

이미 다 부서지지 않았느냐? 하며 걱정하고 말들 많이 합니다.

본당에서 이렇게 말하시는 분들 만날 수 있구요 신부님들 안에서 조차

이런 말씀 하시곤 하죠. 강정에 쏟아 붙는 노력들만큼이나

각자의 본당에서 진짜 필요한 사람들 어렵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네가 가진 열정들 재화를 나누어 주지 그러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말 오늘 성경에서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많은 이들이 유다의 말을 하고 있음을 생각 할 수 잇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렇게 소비하고 있는 재산이라는 것

이것들을 따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라면

분명 효율성 합리성을 따지자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무모한 것들인지 모른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을 하고있는 이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그 가치

정의와 평화 자유 그리고 이 자리에서 살아오셨던 분들의

추억이 남겨준 참 가치 가난한 이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을

키우고 유지해 나갈 수 있는 행복의 가치 등등

바로 이 자리에서 이들이 그렇게 지켜나가길 꿈꾸고 있는

상대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며 권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가치들 세상의 부와 힘의 논리로 귀결되는

합리적인 효율성과는 분명 거리가 멉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가엾이 여기시어 눈물을

흘리시고 친히 죽음의 장소에 가시어 부르시는 장면

바로 그 죽음의 장소에서 걸어왔던 나자로 그리고 그의 누이 마리아

어쩌면 그 나자로와 그의 누이 마리아는 이 자리에 그토록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향기 나는 향유를 쏟아 붓고 있는 모든

이들 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는 복잡해서 합리성과 효율성을 따진다면

누군가 가엾이 여기는 시선을 용납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효율성과 합리성 이면에 놓여있는 비정함.

우리는 이 비정함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렇듯 냉혹함만이 존재하는 가 마지막으로 물어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냉혹함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이러한 원리대로만 모여져

있지 않은 거 같습니다. 냉혹함이 있다면 이 반대편에서

더불어 마음의 온기로 느껴지는 따뜻함 들이 서로 언제나 충돌하고 있죠.

그 안에서 우리가 찾게 되는 가치 들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가치들이 사회라고 말하는 시스템이 알려주는 기준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이 바라본

향유의 가치와 예수님과 마리아 나자로가 상상 하였던

향유의 가치가 달랐던 그 이유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말하는 사회 시스템의 합리성과 효율성의

원리로 원하시는 분이었다면 이토록 어렵게 당신의 종을

내어 놓으셨을까?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그리고 숨 한숨 내쉬면 생명이 창조되고 산 하나가 무너지는 것은

아무일도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임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당신의 가치를 깨닫게 이끌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장소에서

함께 슬퍼하는 가운데 스스로 그 죽음의 장소에서 생명을

내어 놓음으로서 놀랍게도 세상이 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들을 알려주었고 우리가 그 가치들을 따라 살게끔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갇힌 이들이 풀려나고 눈먼 이들이 눈뜨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효율성과 합리성의 껍질을 깨부수고 이곳을

키지고 있는 여러분들이 보여주시고 있는 그 모습처럼 우리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도 누군가 죽음의 장이 되어있는 이곳에서

함께 울면서 그들과 부활을 꿈꾸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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