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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강정

2014.03.07 00:20

자발적 가난 조회 수:290

하느님 창조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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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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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 강론 신동화

 

찬미예수님!

 

얼마나 오셨는지 한번 볼까요?

잘 들리십니까? 예 감사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의 길 가운데서

선택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의 성경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텍스트라는

사실 혹시 알고계십니까?

왜 성경이 정말 하느님에게서 온 계시라고 말 할 수 있는지

폭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만 가지고도 구분 할 수 있습니다.

르네 지라르 라는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이것을 밝혀내었는데요.

모든 종교나 신화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하는

누군가 하나를 희생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기초한 텍스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경만큼은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희생양들의 편에 서서 이것은 폭력이라고 외치는 유일무이한

텍스트라는 것이죠. 그것의 절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이들에게 폭력을 당하시면서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면서 마지막 순간에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시는 바로 그 장면이죠.

성경이 놀라운 것은 그런 폭력의 장면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왜 폭력적인 텍스트가 많고 신약은 사랑이 많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항상 있어 왔는데 역사가 밝혀준 것은

바로 그 폭력적인 장면들이 인간이 자행해온 폭력들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죠. 가감 없이 드러냄을 통해서

어떤 신화도 그러한 것들을 미화시키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내보내지 않습니다.

네 미화시키고 덮어서 그것을 드러나지 않게 숨겨주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죠.

공지영 작가가 인용했던 그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의자 빼앗기 놀이라고 오늘날의 누리 사회는 의자는 하나씩

하나씩 줄어가는데 먼저 앉는 사람만 살아남는

의자 뺏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죠.

근래의 자살자들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런 걸 볼 때 마다 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 세 모녀 자살한 사건 보셨습니까?

기사 읽어 보셨죠. 70만원이라는 돈을 남겨두고

죄송합니다.’는 유서를 남겨두고 죽은 세 모녀 이야기가

참으로 가슴 아프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사회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자기 검열을 강화시키고 있는가?

그들이 왜 사회탓도 아니고 자기들을 제대로 복지로 이끌지 못하는

차 상위 계층이었죠. 복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발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서 희망 없이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대해서 항변도 하지 못한 채로 도리어 죄송합니다.’는 말을 남기고

죽어야 했는가?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게

자기 스스로가 희생양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희생양에 기초한 사회는 항상 희생양이 필요하죠.

그 희생양은 주로 약한 이들 힘이 없는 이들 소외된 이들

고아와 과부 적(소속)이 없는 사람들 타지에서 온 외지인들

이방인들 그들은 주로 사회 큰 폭력을 가져왔다고 여겨집니다

마하 트마 간디라는 분이 비폭력 시위를 했던 것 기억나시죠.

영국에 대항해서 비폭력 우리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겠다는

불씨가 오늘날 이 자리까지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어떻게 규정을 해 버렸습니까?

이렇게 시위를 하기위해 모이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물타기 라고 볼 수 있겠죠.

너희도 폭력을 쓰고 있지 않냐?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치를 역전시켜 나가고 아니면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을 테니까요.

너도 폭력을 쓰는 무리다! 라고 묻혀 버리기 때문이죠.

폴 오스트라는 작가는 참으로 겸손하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담배에 대해서 나도 담배를 피는 것이 잘하는 짓이고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다른 일들에 비하면

별것 아닌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정확한 이야기이죠. 담배 피는 일도 나쁜 일이 지만

다른 나쁜 일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쓰는 단어를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잘못은 다른 더 큰 잘못에 비하면 별것 아니니까

잘못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죠.

물타기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예 물타기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느게 더 큰 폭력인지 비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냥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것과 담배를 피우다가 산불을 낸 것은

당연히 다르게 다루어 져야 할 범죄이지 않습니까?

담배꽁초를 싸가지고 버린것과 담배꽁초를 산에다 버려 불을 낸 것과는

그 폭력의 피해나 규모에 있어서 다른 것이죠.

차이가 나는 폭력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계속해서 우리에게 정부에서 혹은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폭력에 차이가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그저 우리들이 모여 들면 우리들의 폭력이

마치 온 사회를 위협하는 큰 폭력인양

을 해버리지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적이 없으면 평화도 없죠. 적의 시체 위에서

희생위에 피어나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전재로 한 평화이죠.

오늘날 끊임없이 종북딱지를 붙이면서 적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 적들을 제거 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평화가 올 것처럼

이야기 하기 위해서죠.

그러나 실제로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러합니까?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평화가 누군가의 시체를 뜯어 먹으면서

이루어 나가는 평화 입니까?

죠앤 론링이라는 작가가 해리포터라는 유명한 책을 썼지요.

그 사람이 참으로 뛰어난 감수성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고

자기들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약한 이들을 마구 죽이는 이들을 두고 죽음을 먹는 자들이라는

딱지를 붙였죠.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의 시체를 먹고서 자라나는 그것이 제대로 된 평화일까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안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성경을 받은 사람들이죠.

그래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

너희들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텍스트를 받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란 바로 그것이죠.

진정 너희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깨 닳았더라면

그러나 오늘 그것은 너희에게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면서 그렇게 한탄 하셨죠.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들의 폭력과 폭력이 아닌 것을

구분 짓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논리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주는 것과

진정한 평화가 아닌 누군가의 시신을 밟고 서서

공포위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평화와는 정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계속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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