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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강정

2014.03.11 07:06

자발적 가난 조회 수:191

하느님 창조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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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310일 사순 제 1주간 월요일

 

주례 강론 박동호

 

안녕하십니까?

 

미사를 봉헌 하는데 이 제대 앞에는 수녀님 한분 계십니다.

그리고 다른 하느님의 백성 형제자매님들은

공사장 정문 앞에 앉아 계십니다.

또 우리 수고하시는 경찰 아저씨들도 계시고 오늘 날씨는 정말 좋습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오늘 같은 날씨를 체험하면서

평화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사람 사는 사회는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조금 전에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평화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레위기 말씀은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게 이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이 꾸려가야 될까를 가르치는 내용이겠습니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속여서는 안된다.

동족끼리 사기 해서는 안된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어른이든 어른이 아니든

또 우리나라 사람이든 호주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이웃을 억눌러서도 안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도 안된다.

품팔이군의 품삯을 다음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도 안된다.

귀먹은이이게 악담해서도 안된다.

눈먼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중상 모략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앙갚은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했을까?

오늘 레위기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 생활하는 상태에서

해방을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체험한 내용을

오늘 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는 약한 이스라엘을 도둑질했고

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속였고

또 억눌렀고 빼앗았고 품삯을 주지 않았고

악담했고 장애물을 놓았고 불의를 저질렀고

힘없다고 재판에서 불리하게 재판했습니다.

또 서로 미워하게 했고 그리고 죄를 짓도록 강요했습니다.

이집트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대국 이었습니다.

그 강한 이집트가 노예 생활하는 힘없는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핍박한 것이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인으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삶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폭력으로 짓밟음으로서 강력한 제국을

이집트 왕국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철저하게 부조리함을 체험한 그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펼쳐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그 다름의 내용이 오늘 바로 모세를 통해서 공동체에게 이른 내용들입니다.

계약의 백성 하느님 백성이 꾸려가는 사회는

그런 점에서는 세상과는 다른 길 이집트와는 다른 길

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잊어서는 안될 세상의 길입니다.

세상은 어쩌면 오늘날 어제 복음도 그렇습니다만

유혹에 널려 있습니다.

많은 빵을 갖는 것이 풍요로움이라고

그리고 초능력을 갖는 것이 능력이라고

세상의 모든 것과 명예를 갖는 것이 풍요로움 부유함이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 가지로 성찰 할 수 있습니다만

많이 갖기보다는 나누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선택입니다.

초능력을 가져서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선택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모면 어쩌면 이집트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하다못해 불의와 불법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힘을 동원해서라도 지배하는 것

그것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보다는

이기고 밟아서고 넘어섬으로서 승자가 되는 것만이

마치 세상사는 길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나탈날것입니다.

이집트가 결국은 다른 강대국에 의해서 해체되는 것처럼

힘은 또 다른 더 큰 힘에 의해서 다시 분열되고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걸어가야 할 길은 힘을 구축하는 길이 아니라

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나가도록 요구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그야말로 생명의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무나 상식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길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

말하자면 가장 약한 사람과 한편이 되는 길이 있고

또 거꾸로 이집트처럼 강대국이 되겠다는 유혹에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선택은 물론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만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고 구약 신약성경 전체는

그 기의 끝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축복의 길과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는 길로 분명하게 나누어집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두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꼭 교회여서가 아니라 세상 사회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라면

어느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합니다.

강정은 그런 점에서는 우리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강정을 통해서 평화를 구축하는 길을 갈 수도 있고

강정을 통해서 폭력으로 이집트로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평화의 길을 강정을 통해서 평화의 열매가 맺어 질 수 있도록

헌신하는 삶을 선택합시다.

때로는 우리가 유혹에 노출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집트로 가는 것이 우리의 안위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닐까? 강력한 무력을 갖춰야 그래야 번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유혹에 놓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무력이 아니라 평화를 힘의 구축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서 세상을 하느님 나라다운 모습으로

바꿔 가는데 신뢰하고 헌신해야겠습니다.

오늘 제주 날씨만큼 평화로운 삶이

우리들 가운데서 꺾이지 않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고 우리의 다짐을 새롭게 합시다.

정성을 다해서 봉헌하는 이 미사를 통해서

이 강정을 통해서 세상의 평화의 열매가

꺾이지 않았음을 풍성한 열매를 맺음을

신뢰하고 한걸음 한걸음 용기를 내어서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시다. 아멘미사.jpg미사.jpg기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