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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강정

2014.03.14 05:27

자발적 가난 조회 수:224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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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고 합니다.

강정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많은 곳입니다.

미사를 봉헌 하는 한 순간 한 순간 감사를 드리면서

주님께 더 의탁하면서 기도 합니다.

주님 이 바람으로 저 구럼비를 깨뜨리고

바다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평화를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심어 주소서

.

 

주례 강론 강인철

 

찬미예수님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십니까?

혹은 여러분은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얻지 못하셨습니까?

기도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에는 원래의 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사람의 믿음과 희망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어긋난 현실을 바로 잡을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불행 앞에서 한없이 왜소한

인간의 현실에 대한 고단한 탄식이라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현실의 불행을 이기고 나아갈

힘과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가 나를 추월하는 절대자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그것에 대한 체험의 방식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절대자 하느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느끼고 싶습니다.

기도는 불행과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세상의 불행은 그야말로

자리를 가리지 않는 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기도를 한다고 불행과 재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무지한

무력한 재앙과 상처를 겪어야 한다면

왜 기도하고 굳이 하느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굳이 기도 할 필요가 없고

차라리 하느님은 안 믿는 것이 낳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전재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 가운데 사람이 선택한 불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실패가운데서도

나의 허락을 받은 불행은 하나도 존재 한 적이 없었습니다.

불행과 고통 모두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밖에 것들입니다.

내 삶과 내 목숨마저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대단히 강력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행과 고통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인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것은 불행과 고통 자체의

문제의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해서 내가

맞이하는 태도와 그것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방법뿐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 어떤 재주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 밖의 영역에서 큰 소리를 내기위한 것도 아니고

기도가 인간 밖의 영역에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이라고 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앙의 자리가 인간 밖의 어떤 영역이 아니라

인간 안에 어떠한 태도와 신념을 돈독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닌가?

라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

과연 하느님께 있다는 얘기일까요?

모든 생명을 하느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와 그 방식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룰 수 있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생명은 원치 않은 때와 장소에서

그런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주관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분명하고 명확한 불행한 사건이지만

사실 인간이 지금 겪고 있는 불행조차도 다 알지 못한 채

죽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불행 자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합니다.

고통 자체에 대해서도 인간은 다 알지 못합니다.

고통 그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불행 자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다만 우리가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에 따라서 한사람의 깊이와

생명의 품격이 달라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우리의 신앙과 기도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재앙과 불행이 절망이고 그 끝이 허무라 하더라도

끝내 희망을 간직하고 발버둥 치는 우리들과

무력하고 모진 허무이기에 끝내 희망을 버리고

포기한 사람과의 차이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기에 고통과 불행 그 자체를 기도로 바꾼다고 믿기보다는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를 바꾸고

그러기 위해 기도하며 끝내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로

남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왜 우리가 기도하는 가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은 세상이 설명해 줄 수 없는 무수한 고통과

또한 불행 앞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이 믿음에 관한 희망과 기도를 포기 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에 대한 문제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지 않습니다.

느끼고 함께 연민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의 문제를 머릿속의 문제가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세상에 설명 할 수 없는 많은 불행들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그 사람을 키우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포기한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절망과 포기 단절 이런 것들은 결국 불행만을

지금보다 더 크게 키울 뿐입니다.

믿음과 사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의 믿음

그리고 이 어찌 할 수 없는 현실마저도 이겨내려고 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하느님께 끝까지 믿고 따르고 싶은 이유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우리를 절망에 이끌어 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미사.jpg기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