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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강정

2014.02.28 08:16

자발적 가난 조회 수:327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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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케이슨이 화순항에서 강정으로 옵니다.

대형 케이슨입니다.

그 케이슨을 운반하는 플로팅독 이라 불리는 SFD20000

이렇게 큰 플로팅독은 아시아에서 삼성이 한 대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50평형 아파트 7~8층 높이의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바다에 집어넣고 길을 방파제를 만듭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공사차량들의 먼지로 인해 강정 천이 흙탕물이

됩니다. 바다 또한 사석들로 인해 흙탕물로 변합니다.

그래서 세계 제1의 연산호 군락지의 연산호들이 괴사되고 있습니다.

 

 

227일 연중 7주간 목요일

 

주례 강론 이찬홍

 

찬미예수님!

잘 들리시죠. 걱정을 합니다. 제 말이 잘 들릴까 안 들릴까?

시편 90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100새 수명을 말하는 오늘날과는 적당하지 않은 말씀인거 같습니다만

아마도 사람은 무한하고 영원한 조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이고

생의 마지막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했던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는 말씀처럼

우리가 무엇에서 관심과 마음을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유한하고 마지막이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 안에는 영원한 것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너무 어렵습니까? 욕망입니다.

생각해 보면 강정에서의 그 결론은 욕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욕망이 다만 욕구에 머물러 있을 때는 사람의 통제가 가능합니다.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바라는 욕구는 일정부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삶의 활력을 주는 것으로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욕구를 넘어 채우고 또 채워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욕망이

되어버리면서 완전 다른 성격의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이로움이 해로움으로 변하고 삶의 활력과 평화가 사라져 버립니다.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욕망이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망을 없애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이것도 어렵습니까? 중학생도 아는 문제인데.

여러분 더 놀고 싶고 더 영화보고 싶고 더 게임만 하고싶죠?

예 대답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요? 하면

중학생들도 대답합니다. 절제요. 맞습니다.

그런데 대답 안하시는 거 보니까 몰라서 안 하시는게 아니고

쑥스러워서 대답 안 한 거죠.

제가 막 인상 쓰면서 억압적으로 말하는 거 같습니까?

우리는 우리안의 절제라는 덕으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절제를 통해 내가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하고 마지막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무시무시합니다.

독서에서는 그릇되게 부를 모으고 일꾼들에게 제대로 품삯을 주지않은

나쁜 부자들을 단죄합니다. 분명 세상 안에는 좋은 부자들도 많이 있는데

부자라 하면 나쁜 부자들이 연상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구명가게 까지 침투하여 서민들의 밥숟가락까지 뺏으려 하고

낡은 기계부품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듯

직원을 뽑아 한 10년 잘 부려먹다가 명퇴시켜 버리는 대기업의 모습이

마치 독서의 부자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복음은 더 무섭습니다.

죄를 지을 바에는 아예 죽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손이 죄 짓게 하면 손을 짤라 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면 발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떼어 던져버려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마치 복수 할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구약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한사람도 오지 못하고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가라앉아 있을 것입니다.

혹 오셨다 하더라고 한 팔이 없는 외팔이나 한 다리가 없는 외다리

외눈이로 참석하고 계시겠죠.

오늘 말씀은 죽을 각오로 죄를 피하려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손으로 욕망의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발로 욕망의 길을 걸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으로 욕망의 것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를 쓰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욕망

헛된 욕망을 잘라 버리라는 없애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도와 참외 순을 따러 간 기억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참외를 심고 따기 까지 세 번에서 네 번 정도

참외 순을 딴 기억이 있습니다.

순을 따는 것은 참외 줄기가 계속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열매에 갈 양분을 줄기에 가지 못하게 하여

더 크고 맛있는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순을 따는 것입니다.

보통 과수원의 가지치기와 같습니다.

참외 순 따기나 과실나무의 가지치기는 참외와 과실을 위한 작업입니다.

이는 마치 신앙의 여정 안에서 신앙생활의 결실 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수많은 욕망을 절제하는 것에

비유 할 수 있겠습니다.

참외 순 따기와 과실나무의 가지치기가 바로 절제인 것입니다.

우린 이 절제를 마음의 소금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음의 소금인 절제를 사용하여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미사를 봉헌 합시다.재앙.jpg기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