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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강정

2015.01.12 23:34

자발적 가난 조회 수:106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그대가 평화입니다.

 

원주 가톨릭 농민회가 강정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연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기쁨인지 체험하는 시간들입니다.

 

112일 연중 제 1주간 월요일

 

오늘 강론은 지난 토요일 양운기 수사님의 강론을 대신합니다.

오늘 복음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라고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규정합니다.

인간은 한 순간도 관계없이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정당 할 때 정당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관계설정이 정당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날 까지 신앙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삶을 존경하면서 살아가도록 권유하고 그를 본받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는 다양합니다.

자연과의 관계 인간끼리의 관계, 권력과의 관계, 동물과의 관계,

우리는 한 순간도 관계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권력, 권력과 권력과의 관계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거미줄처럼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강정 해군 기지 앞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면서

해군기지를 만들어 나가는 국가와 군대는 과연 정의로운 관계인지?

국가와 정치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관계인지?

정치와 군대는 어떤 관계인지? 또한 이 관계들은

살상과 폭력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황폐화시키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들은 주변과 어떤 형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재정립하고 우리 삶의 힘을 회복하는

묵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해군기지 건설이 한창입니다.

군대란 전쟁을 하거나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무장된 조직입니다.

이런 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은 명령자의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입니다.

국가 통수권자의 명령을 받고 전쟁을 수행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폭력은

그 명령자의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입니다.

즉 전쟁은 폭력이기는 하지만 합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합법적이긴 하지만 그 결과는 생명의 죽음입니다.

인명의 살상이 합법적이라는 점, 폭력이 합법적이라는 점,

이것이 전쟁과 생명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은 누가 결정하는가 하면 권력을 잡은 세력이 결정합니다.

즉 정치세력이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그 정치권력이

전쟁을 수행하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에 이르러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 됩니다.

즉 전쟁은 정치권력의 판단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고도의 정치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도의 정치행위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쟁이라는 정치행위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즉 국가와 정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안보사업이라고 말하면서 강정에 건설되고 있는

해군기지 건설은 안보사업이라기 보다는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행위이며 전쟁을 준비하는

정치사업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치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사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해군기지 건설은 국가가

정치행위를 통해 사람을 죽여 나가는 사업입니다.

이것이 현재 국가와 정치와 군의 관계이며 전쟁과 생명의 관계입니다.

한국의 정치는 무엇으로 먹고 살고 있으며 한국군대는 무엇으로 먹고살고 있습니까?

한국의 군대와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무엇을 즐겨합니까?

한국의 군대와 집권정치세력은 무엇으로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장기적인 군부통치로 군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우리나라는

남북의 대결구도를 가지고 시민들을 협박하면서 존재합니다.

즉 안보불안을 부추기면서 군대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군부정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군부정치세력은 늘 다음처럼 말합니다.

북쪽이 곧 쳐들어 올 것이니 해군지지 건설해야 한다.

북쪽에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니 우리도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해야 한다.

북쪽이 언제 처 들어올지 모르므로 전시 작전권을 우리가 행사해서는 안 된다.

종북 세력이 남한에 5만 명이 있으니 국가정보원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모든 주장은 시민(국민)들에게 안보불안을 부추기면서 겁을 주는

사기 행각입니다.

시민들은 확인할 수 없는 안보불안에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면서

집권 정치권력의 안보놀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시민들은 정치권력의 안보놀음의 손발이 되어

군대 확장 사업을 적극홍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군대의 정치는 더욱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비서조직이나 보좌 조직들의 상당수가 군 출신들로 채워지면서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의 폭은 감소하였고 민간으로 변신한

군부 엘리트 출신들과 공안 법률가출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국무위원에도 군 출신들이 증가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최고 권력은 민간 여성이지만 그 권력을 옹위하는 세력은 군대와

그 추종세력이라고 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2015년 한국 정치와 군대의 관계이며 우리의 현실입니다.

역사적으로 군대가 통치했던 기간에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기 보다는

힘에 의한 정치가 판을 쳤습니다.

군대 같은 밀어붙이기의 정치의 결과는 개발독재였고 특권층의 강화였습니다.

그렇게 국가와 국민도 슬프게 살았던 것이 군부독재의 역사였습니다.

특권층을 강화한다는 것도 재벌과 손잡고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정치와 군부집단은 스스로 무엇을 할 능력이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반드시 재벌기업과 손을 잡고 일을 벌입니다.

재벌에도 군부 출신들과 정치권력이 섞여 있어서 안성맟춤입니다.

여기서 재벌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최고의 기획을 사업을

군부집권세력에게 제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재벌 기업들에 의해서 권력층에 제안되었던 기획사업이

강정해군기지 사업이고 이명박 정권시절에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던 4대강 사업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군대와 정치, 그리고 재벌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하나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27만 여명의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지만 그중 150여명은

부모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에서 사망해 끝내 그 아들을 제 가족이 돌려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족의 슬픔만 허공에 남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한국의 청년들이 1년에 150여명이 됩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면서 죽어가는 생명입니다.

닷새에 2명의 청년이 군대에서 죽어서 부모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극의 펭귄들은 평소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다가

배가 고프면 바다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사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속에 펭귄의 천적인 바다표범이 살고 있어서

바다에 뛰어든다는 것이 위험합니다.

이 때 펭귄의 무리는 바깥쪽에 서 있는 펭귄들을 밀어내면서

바다에 표범이 가까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바다에 들어간 펭귄들이 별 이상이 없으면 그 때 무리 전체는

바다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사냥하게 됩니다.

문제는 펭귄들 중 바깥쪽에 서 있는 무리들이 가장 힘이 없는 놈들입니다.

힘세고 영향력이 있는 놈들일수록 특권층이 되어 늘 무리의 중앙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펭귄 집단의 안전을 도모하는 원리는 힘없는 구성원들의

희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힘없는 펭귄들이 희생되어야만 강한 펭귄의 무리들이 안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밀어내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을

펭귄들의 관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눈앞에 보이는 이 거대한 군사기지는 정치와 권력, 군대와 재벌,

기득권과 정치의 불의한 관계에 의해 탄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한 관계, 부당한 커넥션은 결국

우리의 이웃의 땅을 빼앗아 강제 수용하는 것이며

젊은 청년들의 생명을 담보로 군대 조직이 유지 되는 것입니다.

소수의 힘 있는 펭귄이 수많은 약자 펭귄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펭귄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복음적 투신과 신앙적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며

시민적 저항과 사회적 고발의 정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과 인권에 근거한 생명 평화 운동의 분명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20103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고가

북쪽의 소행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몇 년 후면 밝혀질 문제이지만 만일 북쪽에서 폭파시킨 것이라면

해군은 북쪽에서 천암함을 폭파시킬 동안 무엇하고 있었습니까?

북쪽의 소행이라면 오히려 해군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 엄청난 국방예산을 쓰면서 천안함에 접근하여 폭파하는 북쪽을

경계하지도 못한 무능함이 오히려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백성들을 속이고 사건의 진실을 덮어둔 군대와

정치세력들이 바로 약한 펭귄들을 죽이면서 살아가는

펭귄의 중심부 권력과 같습니다.

여기 눈앞에 세워지는 해군기지도 결국은 엘리트 군대 권력과

그와 함께 손잡고 배를 채우는 정치세력들,

가장 중심부에 서 있는 펭귄들, 그리고 재벌들의 돈 잔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혼란스런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분명한 관계 정립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고

우리 자신을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알게 촉구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제자로서의 관계를,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분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 나라에 중심을 두신 분이고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분입니다.

그분의 모든 삶은 하느님 나라와관계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하느님나라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하셨고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는 안토니 불름의 말입니다.

안토니 불름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신앙인에게는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해군기지 앞에서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수 있었던 그분을 묵상합니다. 해군기지 앞에서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몰고 간 폭력의 실체를 묵상합니다.

해군기지 앞에서 수많은 약자 펭귄처럼 살아가고 있는

억울한 백성들의 삶을 묵상합니다.

해군기지 앞에서 거대한 해군기지의 거짓과 허위를 묵상합니다.

이 해군기지 앞에서 폭력조직 군을 지키기 위해 입대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150여명의 젊은 영혼을 묵상합니다.

그렇게 사라져간 생명들을 묵상합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그 생명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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