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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강정

2015.01.23 08:20

자발적 가난 조회 수:98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그대가 평화입니다.

23일 오전 8시 예정 되었던 행정 대집행이 연기 되었습니다.

그래도 강정의 바다는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괴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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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일 연중 제 2 주간 목요일

 

주례 강론 강인철

 

찬미예수님!

이번 주 내내 안식일에 관련된 논쟁을 짓는 과정 안에서

오늘 복음은 그것을 요약하고 그것을 넘겨주는 내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당신은 조용히 계시고자 헸으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에 대해서 집단적닌 치유가 일어났으며 특히 사람들이

더 영특한 악령들이 그분의 진면목을 알아봤고 그분의 정체를 밝혔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입을 막으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픈 사람은 고침을 받았고 외로운 사람은 위로를 받았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 도음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쫓겨난 악령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그러면서도 그 악령들의 입마저도 막으십니다.

왜 당신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업 엄하게 일 으셨을까?

당신과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은 스승의 참 모습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당신 미래에 대한 예고 죽음에 대한 예고가 있을 때 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몰이해로 일관했습니다.

스승과 함께 살면서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제자들을 행해

스승을 따로 그들을 특별히 가르치시며 정말 일어날 일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찾았습니다.

빛나는 모습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주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놀라운 치유와 기적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그렇게 군림하는 그리스도만을 찾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쫓아다니고 그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안달이 났지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도망가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광을 바라고 치유를 바라고 돈을 바라지만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로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일

그것뿐입니다.

그분의 완전한 주권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것이 아들 그리스도의 몫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감추고 숨긴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생전에 그를 두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모든 증언에 대하여서도 입을 다물도록 명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찾았지만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나섰지만

병 고침도 받고 먹을 것도 받고 위로도 구했지만

그들은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대신에 용한 의술 쟁이를 만난 것이고

그리스도 대신에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쟁이를 만난 것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열광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를 왕으로 모시려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라 할 수 없었던 것이죠.

병 고침을 받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또 다시 아플 것이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그들은 또 다시 굶주릴 것이며

심지어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 해도 분면 그들은 다시 또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는 일이 중요하고

그 아버지 하느님을 제대로 함께 살고 죽는 일이 중요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만난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느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제대로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병고가 없고 가난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를 수 있는 것이죠.

아프지 않으면 좋죠. 아파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가난해도 행복 할 수는 있어야 하는 것이죠.

고통을 안 당하면 좋죠. 그러나 고통을 당해도 행복 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내 인생의 주인으로 제대로 만난 사람은 다를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안 됩니다.

아프면 다 불행하다고 합니다.

가난이면 불행이라고 말 합니다.

고통스러우면 이게 다 불행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나에게 병고와 가난과 고통의 눈물이 사라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병고와 눈물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예수님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이심을

끝까지 비밀로 남겨두려 했던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부적의 그리스도 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정작 본인도 구하지 못할 만큼

짐승처럼 매달린 무력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을 통해서 하느님은 유력 해 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 안에서 부적을 구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차라리 내가 죽는 십자가를 찾도록 애를 쓰십시오.

내가 유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인생에서

그 힘을 발휘 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 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함께 하는 이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든든한 반석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입니다.

무력함이 드러난 이 땅 우리는 이 강정에서 벌써 수년을 이 믿음 안에서

그 뜻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소외된 곳 관심을 잃어가는 이곳에서도 끊임없는 사랑과 정성을 담아가는 이 일들이

과연 이 시대의 어떠한 표지로 받아들여 질 것인지를 바라보게 되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는 이들과 벗이 되어 걸어간다는 것이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가 사랑해야 될 이들이 누구 인지를

우리가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강정의 슬픔이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또 다른

길임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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