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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강정

2014.06.25 07:51

자발적 가난 조회 수:277

하느님 창조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공사장 출입문이 크게 확장이 되었습니다.

경찰버스들은 아예 해군 기지 건설 현장 안으로 출근을 합니다.

미사가 시작되면 경찰들이 공사장 안에서 우르르 나옵니다.

공사장 측에서는 친절하게 경찰들이 쉴 수 있도록 그늘막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국민을 강제 이동하고 감금하며 종교를 탄압하는 일을 하는 경찰들

해군기지 공사장 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는

그러한 친절에 대한 보답의 그늘막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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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주례 강론 이 안드레아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을 지내고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성인 성녀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 성인 성녀들의 축제일이

성인성녀들이 돌아가신 날 바로 하느님 나라로 불리움을 받은 날이

그 성인 성녀들의 축제일인데 유일하게 우리들의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어머니 우리들의 엄마 마리아와 이 세례자 요한만

탄생일이 당신들의 축일입니다.

요한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다.>

혹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세례자 요한이 유별한 것은 흔히 그의 인품 때문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소개 하듯이,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 분은 내 뒤에 오실 터인데.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의 구세사에서의 위치를 자리매김했던 인물이다.

세례자 요한의 소셜포지션에 대해서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성경의 말들로 짐작컨대,

그는 분명 예수시대에 백성들에게 어마 어마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는 세례를 받았다.

심지어 예수조차도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자 요한은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광야에서 철저한 고독과 치열함으로 오로지 구세주 메시아의 도래를 고대했던 사람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사자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을 만큼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비교되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는 앞에 안 나오면서 뒤에서 이것 저것

다하는 지금 이 나라 이 땅의 기춘 대원군과 세례자 요한 참으로 비교되는 인물이죠.

그런데 기춘 대원군이 과연 겸손한 자인가? 절대로 안 그래요.

그 사람은 세검정성당에서 매주 주일미사를 꼬박 꼬박 드린다고 하는데

과연 이 강정에 와서도 미사를 한번 드려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열심하고 겉으로 보기엔 아주 겸손한 사람인거 같은데

실제로는 우리 박근혜 율리안나 머리 위에서 박근혜 율리안나에게

감내라 대추나라 하는 사랑이죠.

우리가 알고있는 사람중에 남재준 이라는 인물도 있지요.

그 양반도 아주 겉으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래요.

주일 미사 한 번도 안 빠지고 어쩌다 빠지면 꼬박 꼬박 고해성사도 하는

그런 인물이래요. 그런데 과연 그 사람이 참으로 신자다운 사람일까요?

글쎄요. 그런 사람들과 오늘 세례자 요한이 참 낳이 비교가 되는 것 같네요.

세례자 요한을 두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오히려 그를 유별난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의 겸손한 인품만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유별난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가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의

마지막 반열에 속해 있던 광야의 사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

눈이 참으로 맑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 하면 떠오르는 것은 광야이다. 광야는 대단히 무서운 곳,

도시의 질서가통하지 않는 메마른 야생의 공간이다.

늑대와 이리가 출몰 하는 곳,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곳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기에 도시의 삭막함 도시의 철저함 도시의 비인간성,

도시의 어리석음이 더 확연하게 보이는 곳, 도시가 몰고 온 인간성의 파괴와

물질만능의 위력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생명의 질서를 훼손시킬 수 있는지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광야이다.

그러고 보니 광야라는 것이 이스라엘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광야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지금 우리가 미사를 봉헌 하고 있는 이 곳, 이 자리 강정이 바로 광야입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곳 이리와 늑대가 출몰하는 대신에 견찰들이 출몰하는 곳

제가 경찰이라고 하지 않고 견찰이라고 했습니다.

개 견자 아시죠!

세레자 요한이 활동 했던 광야나 우리가 지금 미사를 봉한 하고 있는 이곳

강정 해군기지 건설 현장 앞이나 똑같은 광야에요.

도시의 삭막함과 도시의 비 인간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 광야였다면

잔 이명박 정부와 현 박근혜 정부의 거짓 중상모략 거짓 평화

생명죽이기 이런 것들을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현장 앞이잖아요.

그러면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그 광야나 지금 이곳이나 뭐가 다를 바가 있을 까요?

똑 같죠.

그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매고 야생의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살았던 세례자 요한은 자신 스스로가 광야가 되었다.

그리고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사자후를 내뱉으며 살았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다.> 라는 요한의 말들이 힘이 있었던 것은

그 말을 뒷받침해 주는 그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나까 광야나 이곳 미사를 드리는 현장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우리들이나

또 이곳 강정에 사람들 가운데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나

평화 지킴이들이나 우리 문정현 할베나 김정욱 김성환 신부님이나

또 수많은 활동가들이나 똑같네! 다를 바가 없네요. 그죠?

세례자 요한은 정의를 부르짖었다.

광야에서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선배 예언자들의 전통에 힘입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믿어오고 희망해온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감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가려내었다.

하느님의 정의로움 하느님의 심판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고 할 만큼

우리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내비치는 죽음 이었다.

철없는 소녀의 춤의 댓가가 바로 그의 죽음이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무죄한 이를 희생시키는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삶은 왜 이렇게 모순덩어리 인지 하느님의 정의를 부르짖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평생을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본 적 없었을 세례자 요한인데

왜 이리도 그의 죽음은 우리를 힘 빠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허무함의 나락으로

빠지게 할까요? 이러한 물음들을 던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와 가진 자들 힘없는 자들이 폭력과 억압이

판을 치는 오늘날 이러한 죽음d 그를 더 유별나게 한다.

그의 죽음 자체가 하느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성사이기에

바로<예언자의 죽음>이었기에 그러하다.

세례자 요한이 죽음을 당하던 순간을 상상해 본다.

어쩌면 그도 예수의 죽음의 순간처럼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느님 하느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다가도

이내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나이다.>하며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요한이 살아생전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분명 했다.

<요한에게 가서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을 전하시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 분명 방긋이 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는 시므온처럼 노래 불렀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당신이 말씀 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29-3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주 강정에서 세례자 요한 대축일을 맞이하여

신앙 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신앙은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어두음 속에서도 이 어두움의 시간이 가면

밝음으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 한 차례 거센 소나기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날이 갤 거라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그 어두움 속에서도 그 소나기 속에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계속 되어야 하고 거짓 평화와 불의와 부조리와 억압과 갈라 나누어서

서로 으르렁 거리기, 생명 죽이기에 현안이 되어있는 이 세상에

<그건 아니 잔아! 이 독사의 족속들아!> 라고 외쳐야 한다는 소명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 그 교회의 그 사람들이 바로 세례자 요한

대축일을 지내는 지금 여기 강정 해군기지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우리들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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