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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강정

2014.05.08 15:36

자발적 가난 조회 수:235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주도 올레길로 유명 합니다.

올레의 원래 뜻을 마을 안에 있는 길

집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친구들과 놀 때 할머니 엄마 가 하는 말

올레 밖에는 가지 말라!”

아름다운 자연을 걷다보면 마음이 평화를 얻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힐링 여행이라고도 많은 분들이 표현합니다.

20여개의 코스중 그 백미라고 하는 올레 7코스가

강정이 속한 길입니다.

많은 올레꾼들이 지나갑니다.

미사시간 이곳을 지나는 올래꾼들은 그냥 지나치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카메라나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머물다가 갑니다.

마음이 아파서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다고들 말씀하십니다.

 

515일 오끼나와 평화대행진에 강정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함께 참석합니다.

그래서 연대의 뜻을 나누는 선물을 합니다.

올해는 문정현 신부님의 서각도 그 선물에 포함이 됩니다.

 

58일 부활 제 3주간 목요일

 

주례 강론 신동화 대건 안드레아

 

찬미 예수님!

간만에 서귀복자 성당에서 목요일에 강정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많이 오셨군요!

오늘 독서에서 필리포스사도가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내시가 왜 인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이사야서 53장에 있는 종의노래를 끼고 있었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뭘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는 안나옵니다.

그저 내시가 한 질문이 우리에게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여기에 대한 필리포스의 대답은 아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겠죠.

예수님이 바로 그 예언자가 말한 사람입니다.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의 모든 병고를 짊어지고 가고

죄악을 짊어진 채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그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2천년전에 살았던 그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까?

아니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 까지도 포함하는 이야기 입니까?

라고 물어 볼 수 있겠죠.

우리에게 똑같은 형태의 예수님과 비슷한 형태의

많은 희생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 이후로도

만들어 졌다는 걸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곳 제주에서만 해도 멀게는 43때 희생되신 분들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외국으로 나가본다면

2차 세계 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살해 되었던

수많은 유대인들과 집시들 그 외 다른 모든 인종들을

말살하게 했던 그 일들

가까이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항쟁 때

무차별로 사람들을 죽이고 군대를 투입했던 그 일들

이제는 여기 강정과 밀양의 송전탑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이렇게도 예수님과 비슷한 모습의 희생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거나 배제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참생명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세례 받은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얼마전 세월호의 사건에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들었구요.

희생되신 분들은 물론이고 트럭을 싣거나

포크레인등을 호송하기 위해서 배에 실어두고

자신은 비행기로 이동했던 그 분들은 그것이 화물로 취급이 되어

거기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해서든 받을 수 없는 입장이고

구분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생계수단이고

그리고 그것을 사기 위해 집을 담보로 구입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회사에서 물어줘야 하겠지만

그 회사는 부도를 내 버리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만

이분은 자기가 파산 신청을 하더라도 담보는 넘어가야 되는

그런 입장이지요. 기업의 돈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보존시켜주면서도

개 개인의 재산은 철저히 철저히 날아가는 이러한

법률들이 희생자들을 계속 해서 만들어 내는 법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사제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셨죠.

너희들은 지금 무덤 위에 서있다. 너희들은 무덤에 회칠을 하고서

단장을 하고 꾸며 두고서 그 위를 밟고 서있으면서도

그렇다고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희생자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문화라면

우리가 그것을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다시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무고한 희생양이

무고한 어린양이 희생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한 삶을 만들어 나가는데 우리가 주춧돌이 되어야 되기 때문이죠.

오늘 이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그 질문

예수그리스도라는 옛날 사람으로 끝나는 일입니까?

아니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똑같은 질문입니까?

이사야서 53장 이 내시가 질문한 그 다음 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진리인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를 대신 해서 그가 창을 맞았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으스러졌다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발밑에 시신을 쌓아두지 않고

우리 발밑에 무덤을 만들면서 그것을 밟고 올라서는

그러한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진정한 생명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평화와

생명을 추구 할 수 있는 이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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