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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강정

2014.09.21 01:35

자발적 가난 조회 수:102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추석기간에 수녀님 4분과 신부님들께서 강정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외로운 추석이 서로 위하는 마음 덕분에 풍성하게 지냈습니다.

1년 휴가를 강정에서 봉헌합니다.

명절이 끝나자마자 미사를 봉헌하는 시간마다 경찰들의 공중부양이 시작됩니다.

늘 사진을 찍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찰, 공사차량 출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지시하는 저 경찰이 과연 경찰인지 아니면 공사장의 경비인지?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였습니다.

96일간의 단식, 죽음을 각오한 단식으로 기륭전자의 사태를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년이 넘는 긴 시간의 싸움 끝에 정규직 전환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의 사기였습니다.

일년 이년 정규직 복직을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출근할고 해놓고는

일거리도 주지 않더니 어느날 갑자기 회사가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싸우고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기행각을 일삼는 기륭전자 회장을

고발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고발단을 모집합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합의문을 이행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치인들에게 수많은 금품을 뿌리면서 노동자들에게는 단돈 1원도 줄 수 없다는

기업주를 고발하려 합니다.

힘을 모아 주십시오.

온라인 서명도 가능합니다. 첨부된 서류를 작성하여 메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 사회적 합의 파기 '사기죄' 고발 신청>

온오프라인에서 참여가능합니다.

온라인은 다음 링크를 눌러서 하시면 됩니다.

http://www.kiryung.org/

922일까지 서명 부탁드립니다.

 

 

 

 

920일 토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주례 김성환

강론 양운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을 따를 때는 어떤 자세라야 하는가에 대해 예수님 스스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군더더기 말이 없이 자신을 버려라목숨을 걸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수없이 보았고 들었던 내용이며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오늘 이 미사 복음의 주제는 목숨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목숨을 말하려면 순교에 대하여 설명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순교를 설명할 때 목숨을 걸기 보다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도 순교라고 설명합니다.

또 이웃을 돕기 위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 하는 것도 작은 순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순교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귀다툼으로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약간은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것도 순교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는 초기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처럼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순교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목숨을 걸고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내용을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상황으로 비교하고 묵상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이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현장 앞에서 오늘 복음을 적용하며 순교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봐야

하겠습니다.

국가가 온갖 불법과 탈법, 편법으로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국책사업을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받지도 않고, 주민들의 재산권을 강탈하면서

공사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목격하는 신앙인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또한 신앙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목격하는

상식 있는 시민이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만일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민주시민이라면 이런 국가의 일방적 폭력 앞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라는 단어와 목숨이라는 단어를

언급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이라면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강정 현장에 비추어 말한다면

저항이라고 바꾸어 말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려면 불의에 저항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거든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고 불의한 체제와 제도에 저항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부정선거로 청와대를 차지한 박근혜는 부정선거로 차지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국정원과 검찰 법원 등 공권력의 수장들은 모두 허수아비로 채워

놓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박근혜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언론은 이미 찌라시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국제사회에서는 우리나라를 언론의

자유가 심각하게 도전 받는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2001년 국가 인권위원회가

세워진 이래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서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인권위기 국가로

선정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박근혜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제 왕조시대

여왕일 뿐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현실은 상식보다는 권력이 우선이며 과거 박정희 군사 독재시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숨이라는 단어를 정항이라는 단어로 바꾸는 현실인식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불의에 저항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가톨릭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순교의 개념은 신앙을 위한 증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순교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나 사회정의 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독일의 석한 발터 카스퍼 추기경)

한국교회의 순교자들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정의를 위해 저항하고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국의 순교자들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정의를 위해 저항하고 목숨을 바쳐 신앙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도 후기 조선 사회의 불의와

비인간적 지배자들이 유지하는 정치질서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볼 때 우리 교회의 순교자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시복된 이들 대부분 가난한 농사꾼,

옹기장이, 봇짐장수, 무지렁이 이거나 힘없는 아낙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그리던 민초들이었습니다.

이 민초들과 소수의 지식청년들이 함께 어우러져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원론이요 공론의 기준으로 여겨지고 있던) 주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주자학은 더 이상 증명이

필요 없는 지배사상 이며 지도이념 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주자학만이 백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사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당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신앙운동을 주자학과 그에 기반을 둔

사회질서네 대한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때문에 그들을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순교는 조선 정부의 주자학 중심의 사상통제 정책에 대한 저항의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학의 측면에서 보아도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사상과 가르침, 즉 복음을 통해서 인간 존엄성을 깨달았고

사람은 서로 평등한 존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 충청도 예산 양반집안의 홍낙민과 같은 관리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가 동료 양반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1801, 4, 8. 51

나이로 서소문에서 참수 당하고 죽었습니다.

1790년대 충청도 내포의 양반 유군명은 조선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19세기 말보다

백년을 앞서 자신이 소유한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답니다.

그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는 복음을 실천한 것입니다.

같은 신자라도 조선시대 사회 풍습에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천민을 신분의

벽을 넘어 받아들이는 일과 자신 소유의 노비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바로 복음에

대한 철저한 신뢰였고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형평운동( 衡平運動 )이라 불리던

백정 해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120여 년을 앞서 충청도 보령에는

황일광 이라는 백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1801년 당시 정약종과 같이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천국이 둘 있습니다. 나의 비천한 신분을 사람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니 천국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두 번째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갈 곳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가 신앙을 받아들인 증거입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하인으로

있으며 땔감나무 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고향에서 130일 한겨울 침수되었습니다.

그가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새로운 믿음을 통해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며 당시 주자학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믿음은 순수한 종교적 복음이며 동시에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

이었던 것입니다.

홍낙민과 유군명의 이러한 파격적 행위는 당시 사회의 관습을 무너뜨리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는 계급사회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동료 양반그룹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결국은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노비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1894년 갑오경장보다 100년 앞서 자신의 재산인

노비에게 해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며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상식을 벗어난

사회의 관습과 질서를 거슬러 복음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었고 그 소중한 가치는 그들에게 감옥의 고통과 괴로움과

죽음의 공포까지도 극복할 환희를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유와 인권의 중요성을 행동으로 중거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우리가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유는 피를 먹고 크는 나무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라는 나무를 키워준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들입니다.

이처럼 조선의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 순교자들은 사회와 문화의 변혁을 바라면서

몸소 실천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이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들에게는 무참한 국가의 폭력이 가해졌고 당신의 희생물이 바로 순교였습니다.

조선왕조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주고 당시 사회의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부인하고

정면 도전하여 희생당한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은 반역자요 천륜을 저버리는

도적의 무리로 판단하고 모두 몰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왕조시대의 사회적 몰상식에 도전하고 인간의 품위를 한껏 드높이고

몰살당한 우리 순교자들을 8월에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끌어 올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옳았다는 선언이었고 동시에 그들이

온 몸을 던져 저항했던 체제가 독재국가였고 전제군주 국가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의 중요함을 드러내고 민초들의 저항이 옳았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몰살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린 순교자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적 저항의 정당성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복음적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은 저항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예수정신과 아무 상관없다는 선언이었고

의식을 통해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는 연대의 기도 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문은 이처럼 강정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투쟁이 정당성을 선언한 것이며 그 투쟁에 연대하며 저항하는 선의의

시민들과 교회의 활동가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위로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역설의 진리는 오늘 강정 해군기지 공사장 입구를

지키며 기도하는 우리들의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대헌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상설교(마태 5,17~7,27)

에서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족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받는 고통만큼 그분으로 받는

위로도 많고 크다.’(코린 2,1. 4~6)고 하셨습니다.

이만큼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순간 그분의 위로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자체가 그분이 주시는 한없는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성탄절 성가에 성 빈첼슬라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첸슬라오왕은 맨발로 다니면서 가난한 자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한 겨울 그를 따르는 종이 취위를 견디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자 빈첸슬라오왕은

자신의 발자국을 밟고 따르라고 하자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종의 발이 따뜻하게 달아오른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성인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수반되는 고통과 어려움의 무게는

주님께서 덜어주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유로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 편에서

활동하다가 고통을 받는 다면 우리는 분명 더 큰 위로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분의 생각과 행동을 닮아 결국 그분의 고통까지

이해할 수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그분과의 일치이며

그분과의 일치는 바로 우리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우리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 자신을 버리고 살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 목숨도 돌려주시고

당신과 일치를 이루도록 우리에게 은총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전쟁기지 앞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미국의 군사기지 앞에서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만 믿고 서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스승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불의한 권력앞에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염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한없이 무겁겠지만 그분과 함께 연대하는

십자가는 무겁지 않습니다. 혼자서 짊어지는 십자가는 고통이겠지만 함께 연대하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이라는 희망을 선물합니다.

혼자 십자가를 지고가면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 버리지만 순교자들의 숭고한

저항정신을 가슴에 새긴다면 국가의 어떠한 폭력 앞에서도 비폭력 저항의

고귀함으로 기뻐 할 수 있을 것이며 어절 수 없이 국가에 명령에 따르며

진실을 외면하며 슬픔을 억누르는 경찰관들까지도 기꺼이 사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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