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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제주중앙주교좌성당에서 제주 4/3 추모미사가 강우일주교님 집전으로 거행되였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과 수녀님이 신자들과 함께 참여한 퍼포먼스가 성당 안에서 공연되어 1.000여명 신자들이 4/3에 희생된 영혼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다음은 강우일 주교님의 추모사 입니다.

4. 3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               중앙주교좌성당
                                2004. 4. 2 저녁 미사
요한 10. 31-42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 5주간 금요일 미사를 지내면서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소위 4.3 사건 희생자들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 사건은 50여 년 간 묻혀 있다가 2천년 1월12일 제주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나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2003년 3월 29일 조사보고서가 완성되어 이에 따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희생자들에게 사과도 하고 보상 조처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아직 상당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잘 알지 못하는 잃어버린 기억이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이고 잊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역사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 사건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수는 약 3만 명이고 가옥 39,285동이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으로서 정당한 재판이나 절차 없이 집단 사살, 처형되는 반인륜적인 범죄로 가득 찬 비극이었다. 얄궂게도 4.3사건이 벌어진 1948년 같은 해 스위스 제네바 협정에서 유엔은 이러한 집단학살이 문명세계에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국가 공권력이 정당한 법 절차를 무시하고 민간인, 그것도 여자, 노인, 어린이들까지 무차별하게 살상한 점은 정말 중대한 인권유린이고 이 나라 역사에 있어 치욕적인 오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치욕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치욕적인 역사적 체험에서, 그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의 희생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진상보고서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병존하고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짚어보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시대는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었지만 독자 정부를 갖지도 못한 채 미군정의 통치 하에 있었고 나라 전체가 좌, 우의 이념 대결로 심하게 분열되어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제주도에는 해방 직후 일본 등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여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니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일시에 불거졌다. 실직자가 넘쳐났고, 생필품도 품귀현상을 빚었고, 거기에 극심한 흉년까지 들었는데, 당국의 양곡 정책이 실패하여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4.3 사건이 그렇게까지 엄청난 참극으로 번진 제일 큰 요인은 이 나라 안에서 생각을 달리하는 집단들끼리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향한 적대감과 미움을 부채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거부하며 이를 위한 단독 선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나라를 혼란에서 일으켜 세우려면 하루 빨리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각각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대립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갈수록 조장했고 결국에 가서는 폭력으로 번졌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서, 좌익이 뭐고 우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민간인들, 사상이 뭔지,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일반 주민들까지 그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1945년 이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백성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한 반도가 강대국에 의해 분단되면서 이 나라 백성들은 정치적 이념을 기준으로 편가르기를 시작하며 기쁨은 어느 틈에 대결과 미움으로 바뀌었다. 조선 왕조 시대에도 사색 당쟁으로 편가르기가 있었고 대립하는 당파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으나 대체로 권력층이나 지도층이 교체되는 정도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이 1940년대에 와서는 편가르기와 미움의 구도가 일반인들 사이에까지 형성되어 버렸다.

사실 좌익이라고 자처했던 사람이나 우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나 그런 정치적 이념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이 사회에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예측하지도 못했다. 멀쩡하던 한 집안 한 식구가 어느 날 갑자기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만 듣고 서로 편을 가르고 적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그 분열이 나중에는 끔찍한 참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장 봉기를 한 사람들이나, 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나, 그 사이에 끼여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날벼락을 맞은 희생자들이나 모두 한 백성, 한 집안, 한 식구였다. 이 한 식구를 이렇게 갈라놓은 울타리는 타지 사람들이 알려준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념이었으나 사실 오늘날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이념들은 허구였다. 사회주의는 인류를 결코 행복의 땅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음이 현실 속에서 증명되었고 그 종주국 소련이 공중분해 되었다. 그것은 신기루였다.

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사회주의에 일단 승리하긴 했지만 오늘날 상황에서 보면 무한 경쟁이 불가피해진 시장경제 체제는 국가 간에 큰 경제적인 격차를 가져왔고 이것이 결국 지구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는 분쟁과 테러리즘의 주원인이다. 또 한 나라 안에서 본다면 계층과 개인 사이에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켜 위화감과 절망감을 촉진하고 있다. 자본주의도 결코 우리 모두를 행복의 땅으로 데려가기에는 큰 한계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XX 주의'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념, 사상가나 학자들,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이념들은 정작 가까이 다가가면 그 실체가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신기루 같은 허구 때문에 한 가족, 한 식구가 편을 갈라서 서로를 배척하고 폭력까지 행사하여 상대방을 억압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우매한 짓이다. 이념이나 제도나 조직 같은 것들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인간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용도폐기 될 수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에게 봉사하는 도구와 수단 때문에 인간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이 훨씬 더 귀중한 존재다. 이것이 4.3 사건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역사적인 깨달음이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는 유다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대단치도 않은 보통 사람이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며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 인간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가르치시면서 자기네들 조직에는 가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비록 모세 시대부터 내려온 율법이라고는 하지만 이 율법에 대한 자기네들의 가르침을 하나의 울타리로 삼아서 그 울타리 안에 안 들어오는 사람을 가차없이 배척하고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네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려는 유다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가 또 다시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겪고 있다. 개혁과 보수의 대치,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대치로 치닫는 듯한 분위기가 확산되어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오늘 4.3 사건 발발 56주년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들이 만든 헛된 이념이나 체제나 조직 때문에 편가르기를 하거나 울타리를 쌓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도록 다짐해야 하겠다. 우리가 출신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소속되는 조직이 달라도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을 존중하고 함께 공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보호해줄 때 나의 품위도 보호받을 수 있다. 새 시대를 사는 우리는 모든 종류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공존공영의 미래를 건설해 나가기 위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제주의 돌담을 보면서 나는 항상 참 정다운 담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주의 돌담은 허리 정도 높이에 구멍이 숭숭 나있고 문도 없다. 나와 이웃이 가진 영역은 구분하지만 그러나 상대방을 거부하고 배척하기 위해 높이 쌓아올린 울타리가 아니라서 좋다. 돌담의 높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게 나지막하고 구멍이 숭숭 나있어 자기 집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고 이웃과의 소통과 왕래를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여유를 보인다. 우리는 이 제주인의 지혜를 잘 살려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