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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 그 중심에 교구장이 서 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바로 우리의 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서 있다.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성전건립현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는 바로 그 현장에 서 있다. 우리는 이를 보면서도 모르고 있다. 아니, 알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의 현장부터 가보자.

1. 최근에 신축되는 성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중심에 서야 할 성당이 구석으로 밀려나고 다시 위로 쫓겨나고 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들을 보면 대개가 교리실과 사무실, 식당 등, 이런 것들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들이 저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버젓이 안방을 차지하고 성당을 밀어내고 있다. 우선 이는 상식에도 안 맞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아마 백지위임으로 설계를 맡겼다고 해도 성전이 밀려나는 저런 구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의 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뜻이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음은 2015.7.12. 김기량 성당 사목방문 시 주교님과의 대화에서 위와 같은 지적을 받고서 한 대답이다.

  『좁은 대지 위에 여러 용도의 공간을 배치하려면, 성당을 아래층에 두고 다른 것을 위로 올릴 경우 위층의 소음으로 조용해야 할 성당이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당을 위로 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추세다라고 하였다.

2. 이해할 수 없는 교구장, 그는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가?

   여기는 김기량 성당의 증축 현장이다. 김기량성당은 객관적인 상황을 보고 판단한다면 전혀 증축할 필요가 없다. 지금 증축하는 부분은 성당이 아니다. 교구장의 뜻에 따라 강행하고 있다. 증축한 후에는 현재 1층에 위치한 성당은 위로 쫓겨나고 그 자리는 식당 등 앞서 지적한 것들이 차지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구장의 뜻이다. 한심스럽다. 그럼 쫓아내고 여기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하는 일들을 보자.

   1층에서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초상 때 조문객을 맞는 일. 여기서 술과 고기 등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이용된다. 그 다음으로는 주로 대축일 등 특별한 날 신자들끼리 나누는 이른 바 국수잔치를 벌이는 식당으로 이용된다.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닐까. 지금 증축하는 목적은 오로지 이것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 다음 사용빈도를 보면, 전부 합쳐봐야 평균 한 달에 한두 번, 많아야 다섯 번을 채우기가 힘들 것이다. 조그만 본당에 줄초상날 일도 없으려니와, ‘국수잔치도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마구 하는 것도 아니다. 주로 대축일 등 특별한날에 하는 것인데, 그것도 얼마나 될까? 연중 통틀어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연중 비워두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임은 지금까지 보고 겪어 온 바와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증축을 하고 있다. 장례식장 때문이다. ‘식당만이면 현재로서도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서 초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장례미사 하나로는 성이 안 찬다. 조문객을 불러들여 술과 고기를 대접하면서 그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면 영안실 등 부속 시설이 따른다. 그러려면 넉넉하게 한 층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단 한 번을 쓰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교구장의 뜻이다.

3. 본당신부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명령은 떨어졌다. 아무리 교구장의 명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무조건 밀어붙일 수만은 없는 일. 명색이 본당신부로서의 염치와 체면이 있다. 기댈 만한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겠다. 쥐꼬리만 한 구실이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그에게는 따로 이러한 고충이 있다. 그 말을 들어보자.

   그가 말하는 그 필요성은 교리실 부족이다. 몇 개나 더 필요한지,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막연하게 부족하다고만 했다. 그렇다면 그만큼만 보충하면 될 일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해서 끝낼 일을 따로 한 층을 올리겠다면 신자들은 불필요한 부담을 새로 떠안게 된다. 이것은 신자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교리실은 명분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느꼈음인지 나중에는 이를 버리고 기도실을 내밀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인가? 성당 말고 따로 한 층을 지어 기도실을 두겠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놓는 것마다 유치하고 딱하다. 왜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가? 신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초상을 여기서 치르려고 현재의 식당 공간을 늘리기 위한 것임을.

   장례식장이라고 바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당당하게, 투명하게 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다 아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식상할 정도다.

4. 저 한심한 교구장

   평소 존경했던 우리 강우일 주교님이었다면 저 현장을 보고서, 이처럼 좁은 곳에다 무리하여 저런 것들을 들여다 놓고 성당을 다른 데로 쫓아내다니 이거 뭐하는 짓이냐? 도대체 이런 발상이 어디서 나왔나? 이게 누구의 작품이냐?’라고 노발대발 하였을 것이다. 특히 사회를 향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는 우리의 강우일 주교에게 얼마나 많은 박수를 보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저런 말이 나와야 함은 필연이다. ! 그런데 뜻밖에도, 저런 공간을 두어야 함을 전제로, 성당을 위로 올릴 수밖에 없으며 이는 추세라고 하였다. 식당이 성당을 밀어낸 현장을 바로 앞에서 보면서 한 말이다.

   믿을 수가 없다. 성당을 위로 올리는 이유를 물은 것이 아니라, 성당을 밀어낼 만큼 식당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성당을 그렇게 대접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교구장은 이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였는지,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갔다면 교구장으로서 무책임하다고 할 것이고,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교구장으로서 함량(含量) 미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 순간에도 건물은 기세 등등 올라가고 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불가사의한 저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오직 하나, 바로 교구장의 권위다. 그것은 막강하다. 모두가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특히 본당신부는 복지부동을 넘어서 감동적으로 모금가까지 열창하며 맹활약이다. 모든 것은 교구장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교구장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우상이다.

5.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

   ’전례는 성당에서, 뒤풀이는 식당에서‘. 이렇게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전례에도 참여하고 뒤풀이도 즐기는 것, 이것 때문에 증축을 하고 있다. 저 뒤풀이를, 우리는 친교를 나누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례와 뒤풀이 둘 모두가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것은 문제다. 천주교 용어사전의 설명으로는,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는 하느님과의 교분을 말하며, 그 근본은 하느님의 신성을 공유(共有)하는 데 있다고 한다. 저 뒤풀이는 단순히 우리끼리 나누는 세속적인 교분일 뿐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은 육신과 세속이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라는 구절들을 생각해 보자. 현실은 어떤가? 극복하기는 고사하고 그대상은 이미 우리의 우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성전건립 사업을 맨 처음 설계 단계에서부터 지금 증축에 이르기까지 주도하고 있다. 장례식장 등 불필요한 증축을 강행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우상(=육신과 세속)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교구장도 예외가 아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장례식장 등은 관심 밖의 것들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6. 우리는 선을 넘고 있다.

   야금야금 세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빗나간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제는 금단의 선까지 넘고 있다.

불청객(장례식장 등)들을 성전이라고 말하며 기도한다(묵주기도OO만단 바치기운동)

돈을 걷기 위하여 성전도 아닌 것을 성전이라며 하느님을 앞세우고 모금한다,

성전이 아닌 것을 성전이라고 노래(모금가)를 지어 부른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다. 하느님은 말이 없다. 우리는 분명 선을 넘고 있다. 그 중심에 우리의 교구장이 서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앞서 지적한 성전신축의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우리는 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거의 죽어있다.

   횡설수설하다 보니 지쳤다. 못 다한 말은 다음으로 미룬다.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쉬움 속에 사족을 달고 마치겠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는 전제 하에서 이를 관철시키고 싶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출중한 식견을 갖추지도 못하였다. 주변에 흔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자가 감히 교구장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떤 눈으로 봐도 격()에 맞지 않는다. 격을 따진다면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나는 밑바닥에 서 있고 주교님은 너무 높은 곳에 서 있다. 멀리서 올려다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이에서도 공유(共有)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상식(常識)이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와도 같이 나눌 수 있다. 내가 여기 내놓은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다룰 사안이 결코 아니다. 평범한 것들이다. 일반인으로서 누구나 보고 느끼는 수준의 것들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속에 담아두려 하지 않는다. 경솔하게 막 퍼붓는다. 평소 술자리에서 나오는 비판은 거의 막말 수준이다. 여기 내놓는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거친 것만 좀 다듬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꼭 나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가지고 있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들고, 성급하게 먼저 나섰을 뿐이다. 나서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경거망동인지도 모르겠다. 간절한 마음, 진지하게 서로 나누고 싶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형제자매가 아닌가? 아낌없는 비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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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본당신부의 모금가를 소개한다. 게시판에 나온 동영상을 보면서 옮겨 적었다.

(이 노래는, 본당신부가 주교님의 뜻을 하느님께 바치는 노래라고 생각된다.)

1. 김기량 성당 발령 받고서 내가 주교님 만날 때 성당을 지으라는 주교님 말씀 계셨지, 김기량 성당이라 함~은 우리 교구의 첫 신자요 유일한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성당이라네

<아깝다는 아깝다는 아깝다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약정을 해줄 때 김기량성당 김기량성당 김기량성당이 건립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 완공 된다네>

2. 진실한 봉헌은 뭔가 힘들어 눈물 흘렸네. 신립 갔던 본당 많았던 너무나 힘든 생활이었기에 신앙의 여정 다한 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갔을 때 나의 봉헌에 기뻐하시는 그런 주님을 만나리라 나의 봉헌에 기뻐하시는 그런 주님을 만나리라

<후렴>

3. 모금다니기가 힘들어도 그러나 모금은 계속될거야 교구내 많은 교우분들이 나의 모금을 격려해주네 신자들과 함께라면 나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하나가 되어 우리는 나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거룩한 성전을 봉헌하리라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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