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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강정

2014.03.22 00:05

자발적 가난 조회 수:281

 †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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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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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2주간 금요일

 

주례 고병수 강론 김석주

 

찬미예수님

 

제 몸집이 어디가면 약한 몸집은 아닌데

강정에만 오면 초라하게 그리고 아주 약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안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끝없이 몸부림을 치고 외치고 했을 때 어느 정도의 틈이 보이고

그 틈은 희망으로 다가오는데

우리들의 몸짓과 우리들의 목소리가 그냥 허공에

메아리로 끝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인간적인 한계를 느낍니다.

두 번째 약해지는 부분은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세상 안에 그리고 세상과 함께

모든 사목자들이 있도록 강조를 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간절히 권고 하고 있지만

그리고 양들의 냄새 하나하나를 맡고

교회가 야전병원처럼 정말 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들을 사랑의 손길로 그렇게 보호하기를

바라지만 저는 그냥 사무실에서 지켜보는 그런 어떤 모습 속에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나 신부님 수녀님

그 모든 분들께 참으로 세상 안에 속하지 못하는

세상과 함께 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늘 가슴이 아프고 이 자리만 오면 뭔가를 이야기 한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무의미 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장 안에서 삶의 자리 안에서

그 많은 것들을 선포하시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많은 활동가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을 함께 하면서 매일 매일 진행되는

우리들의 이 약하고 그리고 외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이 미사가 과연 우리들에게 어떤 희망이고

어떤 의미이고 또 과연 무엇을 일깨워 주게 하는지를

함께 묵상해보고 있습니다.

제 고향은 모슬포입니다.

유치원 때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때는

abcd도 요즘처럼 배울 기회가 없어서 중학교 들어가면서

배웠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유치원 때 배웠던 영어 단어 하나가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헬로도 아니고 할로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우리와 피부색갈이 전부 다르면 그냥 할로라고

이렇게 이여기를 했어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꼭

문장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할로 초코렛드 기브미!

그래서 어릴 때 우리는 쫓아다니면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그 사람들만 보면

할로 초코렛드 기브미! 해서 쫓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초콜릿을 주면 우리는 너무나 행보해 했고

이렇게 나눠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이고 참으로 그 당시에는

뭔가 어떤 기득권을 누리고 혜택을 받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만은

시간이 지나고 또 그것을 봤을 때 참으로 아픔의 역사이고

또 우리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그대로 드러냈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 초콜릿의 달콤한 속에 아픈 역사와 우리의 민족성이

말살되는 그런 모습들을 기억 못하고

우리는 단지 그 추억 속에서 그 초콜릿 주었던

그 기억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이 나라 현실도 지금 이 지역의 현실도

또 우리 삶의 자리에 현실도 바로 그 달콤함 때문에

그 눈앞에 보이는 달콤함 때문에 달콤한 입맛 때문에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제대로 가지 못하고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달콤함 속에 묻혀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런 현실적으로 달콤함이 주어졌을 때

많은 사람은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나 그 달콤함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고

그 가치 있는 삶속에서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

분별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의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외침

매일 매일 진행되는 정말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미사이지만 이 미사성제가 이 강정에서 주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미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미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기억입니다.

구약의 파스카의 기억이고 신약의 파스카의 기억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메시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너무나 어렵고 힘들지만 실천해 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죠.

많은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길 할 수도 있고

또 뭔가 이제 패턴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의 미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묻지만

우리들의 의미는 세상에서 보는 그러한 기준의

미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사는 기억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이 강정에서 하는 미사의 기억은

누구를 기억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매일 매일 사람의 삶을 기억해 주셨듯이

우리의 이 보잘 것 없는 미사 보잘 것 없는 부르짖음

이 자체는 세계평화를 위한 하나의 아픈 기억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기억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달콤함 속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옛 삶을 보면 단순히 묻혀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아닌가? 함께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들이 하는 미사

그 자체는 단순한 미사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종교적인 예식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평화를 위해서 하나 하나 우리들의 아픔을

매일 매일 기억해 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런 몸부림과 외침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에는 진정한 평화의 꽃으로 이 세상에

꽃피울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를 봉헌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조그마한 외침과 조그마한 몸부림이

평화의 싹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모아서 함께 미사 봉헌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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