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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강정

2014.09.30 08:43

자발적 가난 조회 수:127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 연대 3주년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잘 견디어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300여명이 온다는 경찰 정보과 직원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가 참석 할지 우리도 모르는데 아니면 대한민국 경찰이 그 300여명을

모두 사찰하고 있다는 뜻인지? 300여명 이상이 모일 거라는 예상을 하고

경찰병력을 준비 했다고 합니다.

순간, 순간 힘들 때 마다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나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곤 했던 것 같습니다.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체험의 시간들입니다.

오늘 다행히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강정 공소 및 평화 사목센터 첫 삽을 떴습니다.

이제 첫 걸음을 뗀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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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일 월요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 천사축일

 

11시 미사

주례 강론 장동훈

 

오늘 이 자리 의미 있는 날 인거 같습니다.

강정마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 연대가

출범한지 3주년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오후에 저의들의 마음을 모아서

짓는 평화사목센타 기공식이 열리게 됩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함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뭐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실제 바쁘기도 했고 마음만은 늘 그랬습니다.

그 돌아와서 몇 일전부터 이 자리 함께 하면서 미사시간마다

문정현 신부님이 울음 섞인 이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말과

전혀 평화롭지 않은 듯 한 신부님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가 굉장히 내가 그리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이렇게 다시 강정마을에 함께

설 수 있게 늘 큰 품을 열어주시는 마을 주민들 활동가 여러분들

신부님 수녀님들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가 종말 했다.

근대는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동시대라 한다면

근대는 여러 학자들마다 다 다르겠지만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또 우리가 알고있는 새로운 동시대에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

그 시대에 가장 극명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같은

세대가 시작되었을 때를 근대의 끝 그리고 현대의 시작

동시대의 시작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근대가 멸망했을 때 그 표현을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로마노 과르디니신부님은 근대의 종말과 함께 창세 때 열렸던

혼돈의 심연이 다시 열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까 미사 첫머리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미 과거일 것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다시 또 벌어지고 있고 또 과거에 다 불의 하다고 판명 받고

인간 역사에서 추방되었다고 생각한 추함 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강정 해군기지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이 현장이 아닐까 저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세상 종말은 팡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오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종말의 소리는 끙끙거리는 신음과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인류전체가 신음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겉으로 들어난 신음 중에 하나가 세월호 용산

수많은 노동자들의 끔찍한 노동 환경 그리고 아무렇게나 벌어지고 있는 정리해고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 형제들이 겪게 되는 일상의 부조리함

또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폭력 인권침해 이러한 모습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디도 가야 될지? 또 어떻게 사는 게 과연 인간다운 길인지

우리는 자주자주 질문하게 됩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그 권위 있고 권능의 자리에 앉아계신 하느님

그리고 그 권능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있는 수많은 존재들에 의해서

다니엘 예언서가 환시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나타나엘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임금이고 만백성의 주인이라고 표시가 되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제 복자회 면형의집에

피정을 오셨던 분들인 거 같습니다.

강정마을에 일부러 방문을 했다고 합니다. 복자회 신부님과 함께

그런데 굉장히 화를 내시면서 너희들이 14후퇴를 경함을 해봤냐?’

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모시고 갔던 젊은 신부님이 아주 쌍욕을 듣고

마음이 많이 상하셨다. 그래서 오후 일정이었던 43평화공원 가는 것조차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모질어 졌는가? 우리가 그리고 이야기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들

마치 그 성역인 것처럼 또 금기 언어들이 몇 개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안보라는 것이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말 국가라는 말 역시

모든 것 위에서 굴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세상이 두 쪽이 날 것 같습니다.

양 진영에서 깃발을 꼽고 서로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고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 말이

갖고 있는 참 뜻이 그 안에서 담고 있는가?

실상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안죠. 탐욕의 다른 표현이고

이기적인 모습 중에 다른 표현이고 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너무나 넓어진 인간 욕망의 그릇을 채우겠다는 그 아우성이라는 것이죠.

겉으로는 자유고 안전한 국가이고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섞어 문드러진 악취가 풍기는 참으로 참혹한 인간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권능의 모습을 그려 내고있는 예언서와 또 오늘 복음말씀에서 이야기 하는 그 권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권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보였던 그 신자분들의 강하 반발감 젊은 신부님에게

왜 강정마을에 데리고 왔느냐?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느냐?

왜 이런 원하지도 않는 곳에 데리고 와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라는

그 저항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과연 우리가 고백하고

나의 임금의 하느님 나의 주인 그분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한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히 반대의 것들을 다 펼쳐 보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정말 힘이 있으면 힘 있는 자 앞에서 무력하게

오히려 힘이 없어 보이는 무력함으로 위연하게 저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답답하고 또 무엇이 바뀔까라는 우리는 일상의 절망감들에 빠져있습니다.

이 미사가 무슨 소용이 이겠고 우리의 힘없는 기도들이

어디에 세상의 고통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큰 세계에 의해서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보고 또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위해서

이름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의 세례는

또 우리들의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은 이 반대의 것을

펼쳐놓고 계신 하느님에 대한 동의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힘을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버리는 것이고

누구위에 올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가의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이고

도 스쳐 지나감이 아니라 못내 아쉬워서 또 못내 참아 외면 할 수 없어서

그 가던 길을 멈추고 부둥켜안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아닐까?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이라도 예수님이 보여준 모습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다가 박해가 끝나자 중세가 시작이 되죠.

순교를 해야 천당을 가고 그랬는데 천국 갈 길이 막힌 것입니다.

중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그때부터 수도문화 같은 것들이

수녀님들처럼 우리 수도회 신부님들처럼 이제 수도문화가 꽃피우게 되었고

또 하나의 현상은 성인들 순교자들의 뼈 장기 이런 것들을 보존을 해서

그것을 성당 제단에 묻거나 귀히 여기는 유해공경이 시작이 되는데요.

세례자 요한을 우리 한국에서는 관우장처럼 굉장히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중세는 여전히 미신도 많던 시절인데 그 영험한 존재들이라고 믿었던

요한 세례자의 머리 헤로디아의 딸이 청해서 잘려나간 그 머리라고 주장한 것이

중세 말기에 진짜머리라고 주장 했던 것이 3천두가 넘었다고 합니다.

사람 머리 하나가 3천두로 늘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 인들이 매달리고자 했던 그것은 무엇일까?

구원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순교를 정말 살아야 되는 것인데

순교를 기념하는 것은 또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은

그 순교의 삶인데 그 사람들이 살아냈던 그 삶인데

사람들은 순교자가 버리고 간 그 흔적을 마치 부적처럼

천당 가는 티켓처럼 또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어떤 미신적인

표식처럼 지니고 살았다는 것이죠.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고 근 본질에서 떨어져 나온 빵부스러기에 매달려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도구가 실제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를 가리는 것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우리 교종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가

실상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이 믿음에 대한 오해가 깁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더 낳아 보이고 남들보다 더 배부르고 싶고

남들보다 이름 있어지고 싶어 하는 것이 다

인간이라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인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큰 도전이고 또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임금이라고 고백하는 그 하느님

또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나엘의 임금을 통해서 듣게 된

권능의 자리는 그 권능함이 아니라 정말 무력함이고

남들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디딤돌이 되어주는

그 반대의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우리의 삶으로 끌어 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정은 그런 학교가 되고 있는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모습 곧 우리들이 보이고 있는 삶 순간, 순간 마다

오늘 9월 순교자 성월과 순교자 성월을 기억하고 있는

내일의 삶이 여기서 매일 매일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오늘 축일 맞이하신 모든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 천사본명을 갖고 계신 분들 축하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천사들의 부러움을 샀던 우리 자신 모두에게 그 귀함과

그 소중함과 그 위대함 신뢰하고 또 믿음을 보내는

그런 시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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