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011년 9월 2일 구럼비로 가는 길이 펜스에 막힌 날입니다.
쇠사슬을 하고 막고 있는 마을 주민들과 많은 활동가들이
1,000여명의 경찰의 공권력에 무참히 짓밟힌 날입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구럼비로 들어 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평화를 위한 우리의 비폭력 저항은 계속 될 것입니다.
계속 견디어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9월 1일 연중 제 22주간 월요일
주례 강론 박동호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성찰 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자기 기분에 따른 변덕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어느 정도인가 이구요?
또 한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어떤 숙명 운명을 갖고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첫째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펼쳐서 ‘가난 한 이에게 기쁜 소식,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게 하셨다.’는 이사야서를 읽어주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좋게 말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간단하죠.
사람들이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2등 시민
2등 시민 가운데서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니까 로마의 압제 당시에
유다 지도자들의 핍박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보통의 사람들의
처지에 놓여있었는데 비슷했겠죠.
일제가 수탈해가고 동족의 우리 지도자들이 또 그 지위를 이용해서
억압하는 이중의 핍박의 구조 속에 놓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사야서 말씀이 얼마나 통쾌하고 그리고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읽어주자
그분을 좋게 말하면서 말씀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후반부에서 예언자로서 엘리야때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핍박받는 사람의 대명사인 과부 나변환자가 굉장히 많았지만
모두에게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엘리야 때는 시돈지방의 사렙타 과부에게만
엘리사예언자 때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 에게만
구원과 해방이 실현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말을 듣고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났는데
화가 잔뜩 난 배경도 너무나 분명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당시의 그 사람들 ‘너희들 모두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언자 진리와 자유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만 구원과 해방의 손길이 미친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그런
예수님의 암시에 기분이 몹시 나빴던 것이고 화를 잔뜩 내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을 좋게 말했고 뒤에서는 화를 잔뜩 냈는데
그 근거는 나에게 무엇이 오는가? 이었습니다,
나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뿐 소식의 실현되는 것이 오면
아마 뒤에서도 화를 잔뜩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를 잔뜩 내죠.
여기까지는 이 변덕의 기준이 나에게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
가 바로 예수님 앞에 있었던 회당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판단 기준 이었습니다,
우리표현으로 하자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변덕이었던 것이죠.
기준은 철저하게 자기 입맛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변덕의 끝이 쓰면 뱉으면 되는데 뱉는 정도가 아니라
고을 밖으로 내 몰았고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서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죽이려 했다는 것이죠.
입맛에 맞으면 좋게 말하다가 입맛에 맞지 않으면 죽이려 하는
이 변덕의 끝과 끝이 그렇게 끔찍한 것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우리 오늘의 현대로 성찰해 보면 군중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한 사회 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사회가 한 공동체가 진리의 길에 감탄하면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한 공동체 한 사회가 그 진리의 길을 철저하게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오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진리 자유 정의 형제애 연대 이런 소중한 가치를
좋게 말하면서 놀라워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거꾸로 이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형제애 연대의 이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화를 잔뜩 내고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는지?
우리 공동체가 우리 사회가 전자의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져 있는 것이고
오늘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처럼 후자의 길
진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리고 정의를 땅 속에 묻어 버리고
자유를 짓밟고 그리고 형제애를 무시하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벼랑 끝에 서 있음을 봐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세월호 사건 때도 그렇고
용산 쌍용 강정 밀양 다음에 윤일병 치사폭행사건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우린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형제애의 연대를
벼랑까지 내몰고 가서 거기서 아예 떨어 뜨려 버리려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번째 성찰할 빛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루가 복음을 우리가 듣고 있는데
루가 복음의 4장 16절 30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입니다.
그 앞에 부분이 예수님의 탄생기 유년기 이고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청년이 세상에 나서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대목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기심 자기만족
자기만의 행복 자아실현이 아니라 철저하게 타인을 위한
소명의 삶을 공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파견 하셨다는 것
파견한 의도가 남 특히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
잡혀간 이에게 해방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내는 온 세상의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것이 한 청년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존재의 이유
살아가는 이유임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입니다.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위한 이로움이 아니라
가난하고 잡혀가고 눈멀고 억압 받는 말하자면 사회가
내다버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하느님께서 맡긴 사명을 수행하게 되면
숙명이 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오늘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보였던
첫째 사람들 반응처럼 그분을 사람들이 좋게 말하고
칭송하고 해야 되겠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맡긴 그 일을 하게 되면
결국은 벼랑에 끌려가서 거기서 죽을 수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땅에서 이 시대에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형제애를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의 숙명을 성찰하게 됩니다.
벼랑에 내몰린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형제애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그 대신 벼랑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떨어질 수도 있는
숙명의 길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산에서 쌍용에서 밀양에서 강정에서 또 세월호에서 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많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가두고 많은 사람을 눈멀게 하고 많은 사람을 억압하는
탐욕의 불의의 세력이 얼마나 힘이 세고 끈질기고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우리는 생생히 보고 있습니다.
그 힘 앞에서 때로 오리는 포기하고 싶고 때로 우리는 외면하고 싶고
때론 우리 달아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고 무심하고 달아남으로써 좀 편하게 지내고 싶고
좀 기쁘게 지내고 싶고 좀 안락하게 지내고 싶은 바램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변함없는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우리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상 이 사회에 보내셨음이 이 시대 이 땅에
그리스도인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복음의 기쁨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그런 가르침을 내 놓았습니다.
내용인즉 시간은 영원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에 시대, 시대
그때, 그때 겪는 사건에 대해서 일희일비 할 수도 있으나
시간을 주재 하시는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서는 모든 일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하나의 사건 앞에서
일희일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둠의 세력 불의의 세력 악의 세력 미움의 세력
탐욕의 세력이 세상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 이곳에 보내셨음을 신뢰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 멈추지 않고 쉼 없이 한걸음, 한걸음
내 딛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주님의 도움을 미사 중에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