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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강정

2014.09.22 08:28

자발적 가난 조회 수:142

하느님 창조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일입니다.

경찰들도 없고 공사차량도 없는 날입니다.

일반 차량이 출입을 하려고 하면 경비 분들이 안내를 합니다.

12반 이후에나 차량 출입이 가능하다고 안내를 합니다.

이렇게 11시부터 1시까지 어차피 점심시간이기도 한데…….

 

저는 2008년 기륭전자의 해고 노동자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문제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

96일 단식을 하고 있는 너무나 가녀린 김소연 유흥희 두 노동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오석순 행란언니 인섭씨 종희....

송경동 시인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싸움뿐만 아니라 연대 할 곳이 있으면 함께 연대 해주는

이 기륭의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진짜 연대가 어떤 것인지도

이들에게 배웠습니다.

이들이 또 어려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사회적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야반도주한 기업주를 고발합니다.

그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기에 성공과 효과라는 경제적 논리는 접어 두었습니다.

그 정당성만을 보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웹자보에 나온 싸이트로 들어가서 서명해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오늘까지 부탁드립니다.

  기륭 전자 최동열 화장 사기죄 고발운동.jpg


 

 

921일 연중 제 25주간 주일

 

주례 강론 김성환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을 여러 각도에서 적용을 합니다.

저는 두 각도에서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일부 교부들이 보는 각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 나름대로 보는 각도입니다.

일부 교부들이 보는 각도는 이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그의 포도밭에 데려오고 그리고 오전 9시 정오인 12

그리고 오후 3시 마지막 오후 5시에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이른 아침에 일자리를 얻는 일꾼들은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9시에 일자리를 얻는 일꾼들은 여전히 젊지만

조금 더 나이 많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오인 12시 오후 3시에 일자리를 얻는 일꾼들은 젊은 시기는 지났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생 단계가 아닌 상태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바오로 사도가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나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오후 5시에 일자리를 얻는 일꾼들은

인생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상에서 우측에 있었던 도둑 즉 우리가 우도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의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돌아가시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한 포도밭 주인은 마지막 5시에 일자리를 얻는 일꾼들에게

먼저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른 아침에 일자리를 얻은 일꾼들이 투덜대며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두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도자가 먼저 어느 수도회에 들어갑니다.

두 번째 수도자는 첫 번째 수도자보다 나이가 적어서 한참 후에

같은 수도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선배 수도자는 그 수도회에서 최고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고

교회에서도 아주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후배 수도자는 나름대로 그 수도회에서 열심히 살아 갔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 수도자를 참 많은 사람들의 평이 긍정적이고

좋은 평가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수도회와 교회에서 선배처럼

높은 직책까지는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수도자는 세월이 갈수록 사회를 보는 시각이 우경화 되어 갑니다.

한편 후배 수도자는 한결 같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갑니다.

선배 수도자는 후배 수도자의 살아있는 가르침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사람 앞에서

그 후배 수도자와 그리고 그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선배 수도자는 교회의 전통을 걷는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선배 수도자보다 더 높은 교회의 어르신이 그 수도회를 방문해서

그 선배 수도자 앞에서 후배 수도자의 행동에 정당성을 지적합니다.

그 선배 수도자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아마 그 이후부터 선배 수도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 불평을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수도생활을 통하여 당신을 섬겨왔는데

나에 비하여 당신을 늦게 섬겨온 후배를 왜 칭찬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제 나름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5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습니다.

왜 이렇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선한 포도밭 주인인 하느님께서는 주었을 까요?

이른 아침이나 오전 9시에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일찍 고용되었다는 생각에 불안이 들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5시에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고용되지 못한 것에

불안 속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기다리는 것 빼고는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무능력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5시에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의

이런 가련한 측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 임금을 많이 주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도 무시 하지는 않지만 고용된 사람이 불안한 처지

그리고 가난한 처지도 동시에 보면서 임금을 지불 합니다.

그래서 오늘 첫 독서에서처럼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인구가 대략 2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노사 간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임금 설정문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임금 설정도 그 사람이 일 한 만큼 임금을 줍니다.

하지만 이는 교회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사람의 직장에서의 헌신도도 보지만

그 사람이 그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도 동시에 봅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적정 임금을

고용주가 주어야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이렇게 이야기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 최저 임금제가 아니고 생활 임금제를 도입한 사례가

우리나라 일부 지자체와 단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생활 할 수 있도록 임금을 투자한 것입니다.

이 생활임금이 교회의 임금에 대한 가르침과는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그 쪽으로 근접해 가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노동을 돈 만으로 보는 대한민국에서 한 인간의 직장에서의

헌신도만 보지 말고그 사람이 어느 정도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적정 임금을 주는 그런 세상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당해고도 되지 않고 임금체불도 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이 노동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간극이 없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5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이 죽어간 이 나라에서

노동에 대한 결과인 임금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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