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2017 하반기 사제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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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 행동’의 시작은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이 제주도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고 이를 어길 때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 발표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1948년 11월 17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제주도지
구에 계엄을 선포하면서,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지경(合圍地境)으로 정한다.”고 하여 제주도 토벌의 강력한 입장을 밝혔
다. 따라서 4·3은 ‘해결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인식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와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
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叛徒)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전
각료 및 공무원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43 이듬해인 1949년 봄이 되자, 언론은 “제주도 반란이 일어난 지 어언 11개
월이 되었다. 반도 섬멸은 멀지 않았다.”는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의 제주시
찰 담(7)을 보도하였다.
1949년 4월 9일 제주 순시를 마치고 귀경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란분자를 다
숙청하기로 결심한바 제주도에서부터 먼저 정돈하였다.”고 밝혔다.
※ 참고 : 존 메릴(John Merrill) “제주도 반찬(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 1980)
요지
43폭동은 남로당에 의해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자연 발생적인 인민봉기로 시
작된 사건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빨치산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폭동기간 제주도민의 10%인 3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에 대해 게릴라측도 책임이 크지만 대부분 정부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43폭동은 농민봉기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지식인 지도하에 고도로
발전된 조직을 배경으로, 해외 거주로 근대사상과 접할 수 있었던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진압작전 전 과정을 통해서 고문관으로 참석하고 있었으며 흔희 작전에 수반되었던
과도한 잔혹성을 개선시키도록 조력했어야 했다.
한국에 민주주의를 수립하겠다던 미국의 점령정책이 실패한 것이다.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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