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2017 하반기 사제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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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와 같이 격렬한 대중적 저항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43폭동의 의의는 섬이란 협소한 장소에 극한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적 구조
를 다시 부과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 여타의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난 많은 봉기 중의 하나
에 속한다.
43폭동은 한국에서 좌우간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대의 한국정치의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제주4·3 폭동’
1948년 4월 3일 한라산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에 대한 습격이 있은 직후인
4월 5일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은 ‘5·10 총선거 촉진 대강연회’ 석상에서
“제주도에서 총선거 반대 폭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
을 미군정 경찰은 즉각 ‘폭동’으로, 무장대를 ‘폭도’로 규정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경무부의 발표를 수용하여 ‘제주도 폭동사건’, ‘전도에 걸
쳐 봉기된 제주도의 공산계열 폭동’, ‘제주도 반선(反選) 폭동사건’ 등으로 보
도하였다.
4·3폭동의 용어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일반화 되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잠시 열렸던 4·3 해결의 물꼬는 다음해 일어난 5·16 군
사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군부독재의 억압체제 속에서
4·3 논의는 금기시되었다.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의 억압기제는 4·3에 대
한 발설조차 할 수 없도록 했다.
△ 1967년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4·3을 ‘제주도 폭동’이라고 규정
하면서 4·3을 제주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군사정권 하에서 ‘4·3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한 획일화된 공적 인식만이 통용되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도 국가 공공기관은 폭동의 인식에
서 벗어나지 못했다.
△ 1988년 국방부에서 펴낸 『대비정규전사(對非正規戰史』에는 “4·3폭동사건은
해방 후 사회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소수의 공산분자들이 순박하고 가난한
섬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주도를 공산화하려고 획책한
사건”으로 서술되었다.
△ 1994년 제주지방경찰청에서 발간한 『제주경찰사』는 기존의 폭동 인식을 고
수하여 4·3단체의 항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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